이승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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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00 hwan coin obverse.jpeg||right|thumb|[[1959년]]에 만들어진 백 [[대한민국 환|환]] 동전에 이승만이 그려져 있다.]]
'''이승만'''(李承晩, [[1875년]] [[3월 26일]] ~ [[1965년]] [[7월 19일]], [[황해도]] [[평산]] 출생)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겸 교육가·언론인·
== 초기 생애와 교육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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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는 [[대한제국]]을 방문, [[고종 황제]]를 예방하게 되는데 [[한국]]은 [[미국]]이 한국의 독립에 우호적인 입장으로 판단하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으나 앨리스 루스벨트는 융숭한 대접만 받고 되돌아갔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4260805481&code=940100 경향닷컴 | Kyunghyang.com<!-- 봇이 붙인 제목 -->]</ref> 뒤에 가쓰라-테프트 조약의 진실을 알게된 이승만은 미국이 한국을 일본에게 팔아넘겼다고 확신하였고 그후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ref name="이정식 297"/> 밀사활동 실패에 실망한 이승만은 미국에 남아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다.
=== 도미 유학 ===
[[1907년]]에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lang|en|Bachelor of Arts}})를 받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그리고 [[1910년]]에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ref>{{언어고리|en}} Rhee, Syngman,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PhD Thesis, Princeton University, 1912.</ref>라는 논문으로 철학 박사 학위({{lang|en|Doctor of Philosophy}})를 받았다. 학비나 후원자가 없던 이승만은 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였다. 그의 처지를 알게 된 지도교수가 학교에 요청하여 장학금과 박사학위 출간 비용을 지원받기도 하였다.(박사 논문 제본 비용 80[[미국 달러|달러]]가 없어서 논문은 2년 후인 [[1912년]]에 출간된다.) [[장인환]]·[[전명운]] 의사가 [[1908년]]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하던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슨을
이승만은 서구적인 교육을 받은 영향으로 그의 이름을 성보다 앞서 사용하는 서양식 이름을 썼다 (Sungman Rhee, 또는 승만리). 당시 박사가 거의 없었던 한국에서 이승만은 '박사'의 대명사가 되었고, [[1948년]] 대통령이 된 뒤에도 사람들은 그를 이승만 대통령보다는 '이승만 박사'라고 불렀다. [[1910년]] 한국으로 돌아가 [[YMCA]]에서 교사로서, 그리고 이어 YMCA 청년부 간사로 취임하여 기독교를 선교하였는데<ref>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48쪽 참조.</ref> [[감리교]]파 선교사로서 생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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