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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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벤트로트는 1945년까지 악단을 이끌면서 제국 방송에 많은 녹음을 남겼으며, 종전 후에도 소련군 군정의 허가를 받아 악단을 존속시키는 데 기여했다. 후임으로는 헤르베르트 알베르트와 [[프란츠 콘비츠니]]가 차례로 카펠마이스터에 임명되었으나, 1962년에 콘비츠니가 급서하면서 약 2년간 공석 상태에 있었다. 1964년에 [[바츨라프 노이만]]이 후임으로 임명되었으나, 노이만도 1968년에 망명한 [[카렐 안체를]]의 대리로 급히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옮겨가면서 사임했다.
 
이후 하인리히 본가르츠와 [[쿠르트 마주어]]가 차례로 카펠마이스터직을 계승했으며, 마주어는 전통적인 독일계 레퍼토리 외에도 자유화 시류에 맞추어 [[조지 거슈인거슈윈|거슈인거슈윈]] 등 미국 작곡가들의 작품을 과감히 다루었고, 동독 정부 말기에는 반정부 시위에 참가하는 등 진보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통독 후에도 마주어는 직책을 계속 유지했으나, 1991년에 [[뉴욕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을 겸하면서 관계가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1996년에 마주어가 사임한 후 한동안 카펠마이스터 공석 상태로 활동했으며, 1998년에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가 신임 카펠마이스터로 임명되었다.
 
블롬슈테트는 2005년까지 직책을 유지했으며, 후임으로 [[리카르도 샤이]]가 임명되어 현재까지 재직 중이다. 게반트하우스가 내세우고 있는 표어는 라틴어로 'Res severa verum gaudium' 으로, 이는 연주회장 뿐 아니라 연주회장의 상주 단체로 활동하는 모든 악단에도 적용되어 있다. 한국어 번역은 '진정한 즐거움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로,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세네카]]의 저작에서 따온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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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제국 관현악단들의 하나로 인정받아 병역 면제 혜택 등을 받으며 존속했으나, 1944년에 연합군의 폭격으로 게반트하우스가 전소되는 등의 타격을 입었다. 이후 시내 영화관이나 회의장 등을 임시 공연장으로 사용했으며, 현대적인 설계로 건립된 세 번째 게반트하우스가 1981년에 준공되자 상주 악단으로 들어갔다. 신 게반트하우스는 음향 조건이 탁월해 세계적인 클래식 공연장으로 손꼽히고 있다.
 
녹음은 악단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늦게 시작했으며, 1930년대 초반에 토마스 교회의 칸토어 [[칼 슈트라우베]]의 지휘로 녹음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바흐]]의 칸타타들이 최초 녹음으로 기록되고 있다. 아벤트로트는 2차 세계대전 시기에 제국 방송국에 여러 종류의 방송 녹음을 남겼으며, 종전 후 본격적인 상업 녹음은 콘비츠니 재임기부터 동독 국영 음반사였던 도이체 샬플라텐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노이만과 본가르츠, 마주어도 같은 음반사에서 녹음 작업을 했으며, 특히 마주어는 위에 서술한 거슈인거슈윈 등 미국 작곡가들의 작품을 음반 목록에 추가시켰다.
 
동독 정권 말기부터는 [[도이체 그라모폰]]이나 필립스 등 서방 음반사와 도이체 샬플라텐의 공동 작업 형식으로 음반이 제작되어 해외에도 보급되었고, 마주어는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페터 귤케가 새로 편집한 악보로 녹음하는 등 동시대 고증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샤이는 전속사인 데카에서 음반을 제작하고 있으며, 동시에 [[아이튠즈]] 등을 통해 온라인 음원 시장에도 연주회 실황을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