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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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희'''(尹致羲, [[1797년]] - [[1866년]])는 조선시대의 문신이다. 본명은 치수(致秀)로 나중에 치희로 개명하였다. [[윤덕영]]·[[윤택영]] 형제의 증조 할아버지였다. 자는 성여(成汝), 호는 금범(錦帆). 시호는 문헌(文獻). 본관은 [[해평]]. [[윤두수]]의 손자 [[윤신지]]의 7대손이다.
 
[[조선 순조|순조]] 때에 과거에[[과거]]에 급제하고 [[사관]](史官)을 거쳐 [[1834년]] 홍문관에 발탁되었다. [[1838년]] [[태조]]의 영정을 보완하여 광명전(光明殿)으로 봉안할 때, 집례(執禮)로서 봉안에 참여하여 당상관으로 승진했다. [[1842년]] 대사성을[[대사성]]을 거쳐 의주부윤으로[[의주|의주시]]부윤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형조판서에 승진, 예조판서 겸 존호도감제조(尊號都監提調), 한성부판윤을 지냈으며 [[청나라]]에 파견될 동지사로 선발, 청나라에 다녀왔다. 55년 형조판서, 56년 함경도관찰사를 지내고, 63년[[1863년]] 중추부지사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귀국후 공조판서가 되었다.
 
== 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