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 음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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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Lautenmacher-1568.png|thumb|200px|[[류트]]는 아랍 지역에서 전파되었다. 1568년도에 만들어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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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음악'''은 한국을 비롯하여 중국·일본·인도의 음악과 함께 동양 문화민족의 대표이며, 서아시아·중앙아시아 및 아프리카 북해안에 걸친 이슬람 음악권의 본원이기도 하다. 광의로는넓게 보면 이슬람 음악과 같은 뜻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협의로는좁게 보면 터키·페르시아 등의 음악과 구별하여 아라비아반도[[아라비아 반도]](사우디아라비아)의 음악을 뜻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그 이웃인 이라크·시리아·요르단·레바논·이스라엘 등 각국의 아랍인 음악도 포함한다. 이슬람 교도의 음악적 영향은 중세 유럽·근세 이후의 인도·동남아시아·에티오피아·수단 등에까지 미쳤으며, 그리스트교 및 불교의 문명 속에서 자란 음악과 함께 세계의 3대 음악권의 하나라하나라고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있다.
 
== 이슬람아랍 이전의음악의 아랍음악역사 ==
=== 이슬람 이전의 아랍음악 ===
Islam 以前-Arab 音樂 마호메트의 이슬람교국(敎國) 창립(622)까지의 자연숭배나 우상숭배를 했던 무명시대(無明時代)에도 아랍 음악은 물론 있었다. 유목생활 가운데서 원시적인 노동의 노래나 제전음악(祭典音樂)이 발생했으나, 일찍부터 선진 문명국인 헤브라이와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았다. 이어 데헤자스 지방(홍해와 마주한 반도 북서부)을 중심으로 상업이 번성하여 대상(隊商)의 활동이 융성해짐에 따라 노래(후다)가 발생했다. 2, 3세기에 왕국이 남북에 건립, 궁정에서 직업 음악가나 무희(舞姬)가 활동하고, 또한 악기 하나로 각지를 돌아다니는 음유시인(吟遊詩人)이 중요한 구실을 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후세의 아랍 음악인은 이 시대에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아랍인이 메소포타미아나 시리아까지 번짐과 동시에 성지(聖地)를 쫓겨난 유태인이 반도의 서해안에 남하하여 헤브라이 음악이 들어오게 되었다. 또한 사산조(朝) 페르시아(3-7세기)의 음악도 크게 채택되었다. 나슈브(戀歌), 라사(哀歌), 카시그(讚歌) 등의 시(詩)가 생겨났으며, 시인이 작시·작곡을 겸하였다.
 
=== 이슬람 시대의 아랍음악 ===
622년의 마호메트의 헤지라(메디나 聖遷) 이후의 이슬람 시대는 사라센 제국 시대와 그 이후로 크게 나눌 수 있으며, 음악사적으로 다시 세분하면 정통 칼리프 시대(622-661), 옴미아드조 시대(661-750)의 융성기, 아바스조 시대(750-1258)의 거의 전반기에 해당하는 전성기와 그 후반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정체기로 크게 나눌 수 있다.
 
==== 융성기 ====
이슬람교에서는 음악을 금제(禁制)의 하나로 삼기 때문에 종교음악은 끝내 생겨나지 못했다. 그러나 세속음악은 궁정·귀족·부호 등의 보호 아래 교의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행하였다. 마호메트의 한 아내는 가희(歌姬) 출신이었으며, 아랍의 대표적 악기가 된 우드('ud)의 보급이 시작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옴미아드조에 와서는 사라센 제국이 건설되자 수도를 메디나에서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로 옮겨 페르시아나 비잔틴과 교섭이 많아졌다. 그리하여 헬레니즘 문화를 채택, 그리스의 과학이나 예술이 시리아어(語)나 아랍어로 번역되어 과학적인 음악이론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다른 동양음악에서는 볼 수 없는 아랍 음악의 특징이 되었으며, 궁정의 할렘이 융성해지고 가희나 음악가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 일종의 계급을 형성하여 귀족 및 부호와 유대를 맺었다. 일찍부터 음악이론서도 저술되고 그리스어에 따라 음악을 무지키(Mus gi)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 전성기 ====
다음의 압바스조 500년 동안의 음악의 전성기는 처음 100년간이라고 하겠으며, 한편 에스파냐의 코르도바에서 750년 동안 융성했던 옴미아드조에서는 초기 250년 동안이 이슬람 음악의 전성기였다. 압바스조는 바그다드로 수도를 옮겨 공전의 대도시를 만들었으며, 당시의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이나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및 에스파냐의 코르도바와 함께 세계의 4대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과학과 예술이 궁정 귀족의 보호를 받게 되었으며 특히 <아라비안나이트>로 널리 알려져 있는 제5대왕 하른 아라시도(재위 786-809)의 호화로운 궁정생활 속에는 음악과 무용이 중요한 구실을 다하였다. 이 황금시대에 음악학교가 설립되어 많은 이론가와 음악가가 배출되었다.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잘잘(Zal Zal)은 새로운 아랍 음계를 발견, 그것이 오늘날 아랍 음악의 최대 특징이 되기도 했다. 또한 이스하크 알 마우실리는 <노래의 서(書), (Kitabal Aghani)>를 저술하였으며, 알 킨디(al-Kindi, 873년경. 류트의 4현과 리듬적 선법에 대해 우주론적 입장에서 설명)는 <음악의 서>를 저술하였다. 후자는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아랍 음악서의 하나가 되었으며 또한 시르야브는 코르도바로 옮겨 코르도바 학파의 다수 명인(名人)이나 학자를 육성하였다.
 
==== 정체기 ====
10세기 이후의 동(東)칼리프, 11세기 이후의 서(西)칼리프는 이슬람 음악의 정체기를 맞았으나 이 동안에도 이론가를 배출하여, 특히 음계이론의 연구로는 뛰어난 것이 많았다. 10세기경에 나타난 라바브(rabab)가 보급된 것도 이 시대이며 풍압(風壓) 오르간과 수압(水壓) 오르간이 아랍에서 발달, 유럽에 보급되어 오르간의 역사에 큰 구실을 한 것도 이 시대였다. 몽고인에 의한 파괴가 있은 뒤에 11-13세기 셀주크 투르크의 지배, 계속되는 오스만 투르크 및 티무르의 통치를 받아 서아시아의 이슬람권이 분열하기 시작하자 터키나 페르시아는 독자적인 색채를 띠기 시작하여 아랍 본토의 음악과는 이미 그 본질이 다른 국민음악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서아프리카 북쪽 해안 등도 이슬람 음악권으로 들어갔으며 또한 카프카즈의 중계로 멀리 인도 북부나 동인도 제도에도 이슬람교도의 손으로 이슬람 음악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