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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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이란의 역사}}
 
== 이란인의 형성과 메디아 시대 ==
{{본문|엘람|메디아}}
[[이란 고원]]에 인류가 정착한 것은 아주 오래된 일이다. [[아리아인]]은 이합집산을 거치는데 [[스키타이족]], [[메디아족]], [[이란족]]([[페르시아인]]들) 등이 모두 아리아인의 한 갈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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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인]]이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한 것은 기원전 621년 [[메디아]] 왕국의 [[아스티아게스]] 왕 때로, 아스티아게스는 [[바빌론]]과 연합해 [[아시리아]]를 무너뜨리고 메소포타미아의 북부 지역을 차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메디아는 [[티그리스 강|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유프라테스]] 연안의 '비옥한 [[초승달]]', 즉 오늘날의 [[이라크]] 땅을 차지하기 위해 [[신 바빌로니아 왕국]]에 맞섰으나 결국 패하고 말았다.
 
== 고대 페르시아 제국 ==
{{본문|아케메네스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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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메네스 왕조]]는 [[메디아|메디아 왕조]]와 달리 중앙 집권 체제와 사회·경제적 토대를 갖춘 명실상부한 [[제국]]을 만들었다. 당시의 행정과 치안, 세금 제도 등을 담은 상세한 기록들이 전해온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촘촘한 도로망과 국가가 운영하는 역마 제도이다. 전국 어느 곳에건 보름 이내에 중앙 정부의 뜻이 전달될 수 있었다고 한다. 제국의 수도인 [[수사 (페르시아)|수사]]에서 지금의 [[터키]] 북쪽 [[리디아 속주]]까지 [[고속도로]]가 연결되어 있었고, 이 네트워크는 속주들의 반란을 막는 안보 시스템이기도 했다.
 
== 헬레니즘 왕조의 통치 ==
{{본문|셀레우코스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멸망한다. 알렉산더가 [[바빌론]] 땅에서 후계자 없이 사망한 뒤 광대한 영토는 휘하 장군 4명이 나눠 가졌다. 그들 중 이란을 지배했던 것은 [[셀레우코스 1세]] 장군이었다. 셀레우쿠스와 그 후손들이 이끈 왕조를 [[셀레우코스 왕조]](기원전 312년 - 기원전 247년)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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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셀레우쿠스 왕조는 지배구조를 만들기도 전에 반란에 시달렸다. 현재의 [[타지키스탄]] 지역인 [[파르스]](Fars) 지방(Farsi, 즉 페르시아어의 어원이 됐던)에서는 반(半) [[유목민]]인 [[파르티아족]]([[이란족]]과 [[스키타이족]]의 혼혈)이 [[셀레우코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파르티아|파르티아 왕조]](기원전 247년 -기원후 224년) 를 세웠다. 반란 지도자 [[아르사케스]](Arsaces)의 이름을 따서 "아르사크 왕조"(Arsacid)라고도 한다.
 
== 파르티아와 사산조 페르시아 ==
{{본문|파르티아|사산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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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조의 수도는 [[바그다드]] 근처에 있는 [[크테시폰]]인데, 당시에 이미 200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던 대도시였다. 크테시폰은 바그다드의 건립자 [[아부 자파르 알 만수르]]([[압바스 왕조]]의 2대 [[칼리프]])에 의해 파괴됐고 크테시폰의 건축물들은 [[바그다드]]의 건축 자재로 이용됐다고 한다.
 
== 아랍족의 융성과 중세 이란 ==
{{본문|이슬람의 페르시아 정복|우마이야 왕조}}
[[아랍족]]은 이란인들보다 문화적으로 뒤처져 있던 사막의 유목 민족이었다. 아랍족이 페르시아를 제치고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등장 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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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지배 뒤에도 이란인이 관료로 많이 등용됐고, 교육을 비롯한 철학, 문학, 법학, 의학 등 학문 발달에도 크게 기여했다. 아랍어가 공식 언어가 됐지만, 이란의 민중은 페르샤어(파르시)를 지켰다. 특히 샤나메를 비롯한 페르샤의 서사시는 유명하다. 파르시에서 파생된 말은 인도는 물론이고 아프간을 비롯해 '-스탄'으로 끝나는 대부분 나라에서 오늘날에도 쓰이고 있다.
 
== 이방에서 온 점령 왕조들 ==
{{본문|셀주크 제국|일 한국|티무르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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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이란은 652년 아랍족 침입 이후 1,000년 만에 이민족의 지배를 벗어난다. 오랜 이민족 통치로 이란인들은 반외세 심리와 이방인에 대한 환대라는 상반되는 의식 구조를 갖게 됐다는 분석도 있고, 또 오랜 전제군주정과 외세 통치로 인해 절대 권력에 굴종하는 공포 심리가 체질화됐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적어도 이란은 지리적인 틀에서 이란 고원이라는 땅 안에 언제나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슬람 학자들은 이란이 외세의 지배를 받기는 했지만 ‘결코 땅과 나라 이름을 잃은 적은 없었다.’라고 말한다.
 
== 이슬람 시아파와 사파비 왕조 ==
{{본문|사파비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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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부실해진 틈을 타서 아프간이 쳐들어온다. 1722년 아프간의 부족장 마흐무드(Mahmud)가 이스파한을 함락하고 마흐무드 1세로 즉위한다. 폐위된 술탄 후세인 왕의 아들이 신흥 군벌 [[나데르]]의 힘을 빌어 왕위를 되찾긴 했지만, 이번에는 나데르가 반역을 일으켜 스스로 왕이 되어버린다. 사파비 왕조의 종말이다. 나데르는 초반 피치를 올리다 1747년 암살됐다. 이후 아프샤르, 잔드, 카자르 등 여러 왕조가 부침하는 혼란기가 이어진다.
 
== 카자르 왕조와 근대 이란 ==
{{본문|카자르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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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란의 근대화는 결국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졌고, 자발적인 근대화가 이뤄지지 못했다. 영국의 경제 침탈이 본격화되면서 민중의 반외세 운동도 거세졌다. 1890년에는 영국이 담배 독점권을 가져가자 이슬람 지도자가 금연령을 포고, 결국 독점권을 되찾은 일도 있었다.
 
== 팔레비 왕조와 레자 샤의 개혁 ==
{{본문|팔라비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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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팔레비의 즉위 뒤인 1941년 소련과 영국은 이란을 침공한다. 이란은 연합국의 병참기지가 되었고, 영국과 소련의 경제적 침탈도 심해졌다. 소련군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후에도 가장 늦게까지 이란에 주둔했으며 이를 배경으로 이란 공산당인 [[투데당]](Tudeh party)이 세력을 불렸다.
 
== 모사데크의 민족주의 정권과 팔레비 왕조의 부활 ==
반외세 민족주의를 내세운 [[모하마드 모사데크]](Mohammad Mossadeq)가 이끄는 국민전선이 약진을 보이자 1951년 팔레비 국왕은 등떼밀려 그를 총리에 임명한다. 모사데크 총리는 취임과 동시에 유전 국유화를 단행했다. 이란 유전을 꿰차고 있던 영국은 이란의 자금을 차단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모사데크가 투데당과 협력할 움직임을 보이자,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까지 나서 군부 쿠데타를 사주한다. 모사데크는 반역 혐의로 체포된뒤 3년간 복역하고 고향에 가택연금됐으며 196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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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에 자신감이 생긴 팔레비는 1967년 10월 오랫동안 미루어 왔던 대관식을 거행하고 1971년에는 페르시아 제국 창건 2,500주년 기념식을 페르세폴리스에서 성대히 거행하기도 했다. 내정이 안정되자 팔레비는 중동의 경찰 역을 자임하고 군비 강화에 나섰다. 내용은 실상 미제 무기 수입이었다. 국민들은 이런 친미 노선에 굴욕감을 느꼈고, 이슬람 전통을 무시한 서구화 정책에 반감을 가졌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전에 노엄 촘스키가 쓴 글을 보면, 이란이 당시 중동에서 지금의 이스라엘과 같은 역할, 즉 '미국의 경비견 노릇'(이건 내 말이 아니라 이스라엘 어느 총리의 표현이다)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모사데크 국민전선의 한 분파인 이란 자유 운동,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 세력, 페다인(특공대 혹은 민병대)과 무자헤딘(이슬람 전사) 등 무장 단체들이 모두 반 팔레비 전선에 나서기 시작했다. 반 왕정 운동은 점차 조직화되어갔다.
 
== 팔레비 왕조의 붕괴와 이슬람 혁명 ==
{{본문|이란 혁명}}
과시성 사업과 군비 강화에 예산을 낭비한 결과, 이란 경제는 [[1976년]] 후반부터 눈에 띄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왕정의 무능과 부패 속에 빈부 격차는 오히려 커졌다. [[1977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지미 카터]]는 그간 묵인해왔던 왕정의 인권 탄압에 우려를 표하고 개선을 요구한다. 그러던 차에 [[1978년]] 왕정은 호메이니를 음해하는 기사를 친 정부지에 게재, 국민을 자극하고 쿰 시에서 열린 신학생 데모를 유혈 진압한다. [[이스파한]]의 바자르가 항의 표시로 철시하고 시위에 나서자 다시 무자비하게 해산하는 등 78년 벽두부터 시위와 유혈 진압의 악순환이 시작됐다. 8월 아바단에서 시위 군중이 경찰을 피해 들어간 [[렉스 시네마]]에 불이 나서 400여명이 숨지는데, 훗날 조사에서는 광신도의 방화로 밝혀졌지만 당시에는 누구나 비밀 경찰의 소행으로 믿었다. 9월 성난 군중이 [[테헤란]] [[잘레흐 광장]]에 운집하자 경찰이 무차별 발포, 유혈극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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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연표 ==
=== 왕조사 연표 ===
* [[메디아 왕국]] (기원전 708년 - 기원전 550년)
*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기원전 559년 - 기원전 330년)
* [[셀레우코스 왕조]](기원전 312년 - 기원전 247년)
* [[파르티아|파르티아 왕조]](기원전 247년 - 기원후 224년)
* [[사산조 페르시아]](226년 - 651년)
* [[정통 칼리프]](650년 - 661년)
* [[옴미아드 왕조]](661년 - 750년)
* [[아바스 왕조]](750년 - 821년)
* [[셀주크 투르크]](1037년 - 1220년)
* 몽고의 지배 (1220년 - 1258년)
* [[일 한국]](1258년 - 1349년)
* [[티무르 제국]](1369년 - 1500년)
* [[사파비 왕조]](1501년 - 1736년)
* [[아프샤르 왕조]](1736년 - 1749년)
* [[카자르 왕조]](1796년 - 1925년)
* [[팔레비 왕조]](1925년 - 1979년)
* [[이란 이슬람 공화국]](1979년 -)
 
=== 근대정치사 연표 ===
* 1906년 입헌군주국 수립, 샤 통치 종식
* 1919년 페르시아 조약 - [[영국]] 보호령이 됨
* 1921년 레자 칸의 쿠데타
* 1925년 [[카자르 왕조]] 멸망, [[팔레비 왕조]] 건국
* 1935년 "이란"(Iran)으로 국호 변경
* 1941년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 즉위(9월)
* 1951년 모사데크(Mosaddiq) 정권 수립
* 1953년 모사데크 실각
* 1962년 백색혁명 시작(1월)
* 1963년 [[호메이니]] 망명(6월)
* 1977년 재미 유학생 반정부시위(11월)
* 1978년 반정부 시위 전국 확산(3월)
* 1979년 팔레비 망명, 호메이니 귀국(2.1), 이슬람 공화국 선포(4월), 미대사관 인질사건(11월)
* 1980년 바니 사드르 대통령 당선(1.25), 이란-이라크전쟁 발발(9.21)
* 1986년 미국 관리 비밀 방문(이란-콘트라 스캔들)
* 1988년 이라크와 휴전협정 체결(8.20)
* 1989년 호메이니 사망(6.3)
* 1993년 라프산자니 제6대 대통령 취임(8.4)
* 1997년 하타미 대통령 당선(5월)
* 2001년 하타미 대통령 재선(6월)
* 2005년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취임(8월)
 
== 관련 항목 ==
* [[페르시아 제국]]
 
{{아시아의 역사}}
 
[[분류:이란의 역사| ]]
 
{{Link FA|fr}}
 
[[ar:تاريخ إيران]]
[[cs:Dějiny Íránu]]
[[de:Geschichte des IransIran]]
[[en:History of Iran]]
[[es:Historia de Irá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