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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욱(金光煜, 1580년~1656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회이(晦而), 호는 죽소(竹所),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본관은 (신)안동이다. 고조부는 평양서윤 증이조판서 대제학 번(璠), 증조부는 신천군수 증좌찬성 생해(生海), 조부는 군기시정 증이조판서 원효(元孝), 아버지는 형조참판 증좌찬성 [[김상준]](金尙寯)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현감(縣監) 이천우(李天祐)의 딸이다.
 
1606년 진사시(進士試)에 제1인으로 합격하고, 같은 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槐院)에 배속되었다가 예문관 검열·대교·봉교를 거쳐 병조좌랑(兵曹佐郞), 사서(司書),정언(正言)을 거쳐 옥당(玉堂)에 들어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1606년 진사시(進士試)에 제1인으로 합격하고, 같은 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槐院)에 배속되었다가 예문관 검열·대교·봉교를 거쳐 병조좌랑(兵曹佐郞), 사서(司書),정언(正言)을 거쳐 옥당(玉堂)에 들어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1611년(광해군 3) 다시 정언(正言)이 되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는 [[이이첨]]·[[정인홍]]등을 탄핵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에 아버지와 함께 연루되어 국문을 받았으나 곧 풀려났으며, 1615년에 [[인목대비]] 폐모론이 나오고, 이듬해 인목대비 폐모논의를 위한 정청(庭請)에 아버지 휴암공(상준), 5촌당숙 문정공(상헌)과 함께 끝까지 참여하지 않았다하여 삭직되자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행주(幸州)에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후 복관되어 고산찰방(高山察訪) 고원군수(高原郡守) 판교(判校) 홍주목사(洪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1633년(인조 11) 양서관향사(兩西管餉士)로 국가재정의 확보에 큰 공을 세웠다. 1635년 호조참의 1637년 동부승지 우부승지 1641년 판결사(判決事)에 임명되었다가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갔고, 경직(京職)에 돌아와 병조참의 겸 괴원 부제조(兵曹參議 兼 槐院 副提調)에 임명되었다. 1644년 부승지 겸 세자빈객(副承旨 兼 世子賓客)으로 세자를 모시고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도승지·병조참판·호조참판을 거쳐 형조판서(刑曹判書)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고, 1650년 경기감사(京畿監司)로 나가 수원부사 변사기(邊士紀)의 모역사건을 밝혀냈다.
효종 즉위 후 1652년 개성유수(開城留守)에 보임되고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올랐다. 그후 동지사(冬至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 지중추부사겸판의금부사(知中樞府事 兼 判義禁府事)를 거쳐 다시 형조판서(刑曹判書)을 역임한후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문예와 글씨에 뛰어났으며, ≪장릉지장 長陵誌狀≫을 찬하였고 저서로는 ≪죽소집 竹所集≫이 있다.
 
1644년 부승지 겸 세자빈객(副承旨 兼 世子賓客)으로 세자를 모시고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도승지·병조참판·호조참판을 거쳐 형조판서(刑曹判書)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고, 1650년 경기감사(京畿監司)로 나가 수원부사 변사기(邊士紀)의 모역사건을 밝혀냈다.
 
효종 즉위 후 1652년 개성유수(開城留守)에 보임되고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올랐다. 그후 동지사(冬至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 지중추부사겸판의금부사(知中樞府事 兼 判義禁府事)를 거쳐 다시 형조판서(刑曹判書)을 역임한후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문예와 글씨에 뛰어났으며, ≪장릉지장 長陵誌狀≫을 찬하였고 저서로는 ≪죽소집 竹所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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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촌:동중추 증영의정 운수거사 [[김광찬]]
**6촌:동부승지 증영의정 동림 김광혁
 
 
[[분류:1580년 태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