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가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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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수의 장남으로 기해(己亥) [[1599년]](선조 32)에 탄생하였다. 초수(初授) 영가부수(永嘉副守)에 제수되었다. [[1617년]](광해 9) [[11월 25일]] 서궁 [[인목왕후|폐비]] 문제에 대한 상소를 논의 할때 여러 종실과 함께 의논드리길, "공론은 흔쾌히 따름으로써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소서." 하였다. [[1618년]](광해 10) [[2월 6일]] 서궁 폐비 문제로 연일 논의가 있었는데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은 종실(宗室)로 처음부터 끝까지 정청의 대열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여 [[이이첨]] 무리가 양사(사헌부와 사간원)을 시켜 "임금을 잊고 역적을 비호한 그들의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면서 멀리 유배보내도록 명하소서." 상소하여 유배되었다. [[1623년]](인조 1) [[조선 인조|인조]]가 즉위하고 귀양에서 풀려났다.
 
병자(丙子)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몽진하였으나 청나라 군대에게 포위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복동생 [[광성군]](廣城君) [[이제길]](李悌吉)과 논의하고, 이에 전 찰방 [[원성모]](元成模), 전 첨절제사 [[장운상]](張雲翔), 사인 [[원이길]], 무인 [[원영길]], 주부 [[홍요경]](洪堯儆), 장사 [[기득윤]](奇得胤) 등이 서로 약속하여 맹세하고 의병을 모으니 모두가 공과 이복동생 [[광성군]](廣城君) [[이제길]](李悌吉)을 추대하여 선봉장으로 삼아 남한산성에 다다라서 왕을 배알할 계책을 세웠다.
 
[[1637년]](인조 15) [[1월 초7일]] 길에서 적을 만나 반나절의 교전 끝에 죽이고, 빼앗은 것이 매우 많았으며, 행재소에 노획한 병기를 바치려 하였으나 적의 병사에 의해 길이 막혀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이에 부대를 교외에 주둔하여 기회를 살펴 수로를 이용하여 강화도에 이르고자 하였다. 이해 [[1월 13일]]에 청나라 군대가 사방에서 일어나고 산처럼 모여드니 중과부적으로 대적할 수 없어 안산으로 급히 후퇴하여 오이도 덕물 섬에 웅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