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시대의 문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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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시대에는 [[한자]]가 널리 보급되었다. [[한자의 한국 전래|한자가 처음 전래된 것]]은 중국의 [[철기의 한국 전래|철기 문화]]와 함께였다고 여겨진다. [[기원전 2세기]]에 [[진국]]에서 [[한나라]]에 외교 문서를 보내려는 것을 [[위만조선]]이 가로막은 일이 있었다. 보다 더 구체적인 예로서 [[기원전 1세기]] 유적인 경상남도 [[의창 다호리 고분군|창원시 다호리의 무덤]]에서 붓이 출토되어, 이미 한자가 보급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한자를 사용해 본격적으로 문자 생활을 하게 된 것은 삼국 시대부터였다. 삼국이 자체의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운영해 나가기 위해 능동적으로 선진 중국 문물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함에 따라 한자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율령]]의 반포와 함께 한문 소양이 관리에게 필수적인 요소가 된 것이다. 특히 불교가 수용되어 한역(漢譯) 불경이 보급됨으로써 한문에 대한 이해가 촉진되었으며, 승려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서 한문의 보급에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고구려에선 [[372년]]에 세워진 [[태학]](太學)과 청소년 조직의 [[경당 (고구려)|경당]](扃堂)에서, 그리고 신라에서는 [[화랑도]](花郞徒)에서 한문 경전을 가르친 것으로 여겨진다. 오늘날 전해지는 고구려의 [[광개토왕릉비]], 백제의 북위에 보낸 국서(國書),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등은 5~6세기 삼국의 한문학 수준을 보여준다.
 
백제의 귀족인 [[사택지적]](砂宅智積)이 만년에 불당을 세운 것을 기술한 바와, 고구려의 유명한 장군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전장에서 수나라의 장수에게 보낸 한시는 삼국 말기 귀족들 사이에서 한문학 소양이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