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동맹파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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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고속 성장의 그늘===
[[제3공화국]] 이래 대한민국의 [[군사독재]] 정부는 [[노동조합]]의 활동을 공공연히 탄압하여 왔다. 정부는 [[YH노동조합]] 사건과 같이 노동조합의 단체행동에 대해 [[경찰]]을 동원하여 해산하였다.<ref name="메이데이백년">역사학연구소, 메이데이 100년의 역사, 서해문집, 2006, 156-157쪽, ISBN 89-74-83215-1 </ref> 한편, 노동조합을 결성하였다가 해고된 [[노동자]]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다른 직장을 구하는 데 차별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갖은 이유를 들어 노동조합의 결성 자체를 불법화 하였다.<ref name="서해근현대사">역사학연구소, 함께 보는 한국 근현대사, 서해문집, 2006, 443쪽, ISBN 89-74-83208-9 </ref>
[[대한민국]]은 [[1970년대]] 급속도의 경제성장을 이루었으나 경제성장의 한 축이었던 [[노동자]]들의 근무 조건은 매우 열악하였다. 특히 당시 주된 산업이었던 [[가발]], [[섬유]], [[봉제]], [[옷|의류]]와 같은 산업에는 나이 어린 여성 노동자들은 하루 14시간에서 16시간, 한 달에 28일을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임금]]은 매우 적었다. 근무 환경도 열악하여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결핵]]과 같은 질병을 앓았다. 1970년 [[전태일]]은 이러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구조적인 한계를 절감하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말과 함께 분신하였다.<ref>서중석, 한국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2006, 281쪽, ISBN 89-01-04959-7 </ref>
 
전태일의 분신은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노동자의 권익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제3공화국]] 이래 대한민국의 [[군사독재]] 정부는 [[노동조합]]의 활동을 공공연히 탄압하여 왔다. 정부는 [[YH노동조합]] 사건과 같이 노동조합의 단체행동에 대해 [[경찰]]을 동원하여 해산하였다.<ref name="메이데이백년">역사학연구소, 메이데이 100년의 역사, 서해문집, 2006, 156-157쪽, ISBN 89-74-83215-1 </ref> 한편, 노동조합을 결성하였다가 해고된 [[노동자]]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다른 직장을 구하는 데 차별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갖은 이유를 들어 노동조합의 결성 자체를 불법화 하였다.<ref name="서해근현대사">역사학연구소, 함께 보는 한국 근현대사, 서해문집, 2006, 443쪽, ISBN 89-74-83208-9 </ref>
1983년 구로공단의 노동자들은 이러한 독재 정권의 노동탄압과 블랙리스트의 철폐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1984년 3월 10일 노동조합 활동을 이유로 해고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가 결성되어 노동자의 권익 개선을 위한 운동을 시작하였다. 한편, 같은 해 9월과 10월에는 [[전태일]]의 분신을 계기로 창립되었던 [[청계피복노동조합]]의 합법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나기도 하였다.<ref name="서해근현대사"/>
 
뒷날 선일섬유 노동조합 위원장으로 구로동맹파업에 참여하였던 김현옥은 당시의 노동 현장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이와 같이 노동자들이 [[노동권]]의 보장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커져가던 1985년, 정부가 [[대우어페럴]] 노동조합 위원장이었던 김준용을 구속하자 구로공단의 노동조합들은 연대 파업을 결의하게 된다.
{{인용문2|내가 범양염직에 입사한 것이 72년 11월이었다. 그때가 한참 난방용 스팀을 땔 때인데 한 달에 서너번은 스팀이 고장나서 물이 바닥에 넘쳤다 그러면 우리 시다들은 그 언물을 맨발로 다 퍼야했고 …… 한참 바쁘게 돌때면 세벽 4시 퇴근이 예사였다. 저녁 8시 퇴근은 꿈도 못꿨다. …… 휴일도 한달에 첫째 셋째 일요일 뿐이었고……일당은 하루 130원에서 140원이었다.<ref>1972년 당시 쌀 80kg의 가격은 약 1만원이었다.:[http://media.daum.net/foreign/others/view.html?cateid=1046&newsid=20080906152717104&p=newsis 〈한국경제 60년 특별기획-물가〉쌀 402배·소주 8.7배·대학등록금 62배 ↑], 뉴시스, 2008-09-06</ref> |김현숙<ref>서해문집, 내일을 여는 역사 24호, 2007, 220~222쪽</ref>}}
 
===민주노조의 결성===
[[1980년대]] 초가 되어도 노동자의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의식은 변화하였다. 당시 많은 노동자들이 [[야학]] 등의 교육을 통해 자신들의 불합리한 처지를 개선시키기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하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들은 사측에서 이름만 걸어놓거나 협력적인 사람들로 구성된 이른바 어용노조를 대신할 민주노조를 결성하기 시작한다. 1984년 6월 9일 대우어페럴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11일에는 선일섬유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ref>서해문집, 내일을 여는 역사 24호, 2007, 224~226쪽</ref>
 
당시 결성된 섬유산업 노동조합이었던 대우어페럴 노동조합, 선일섬유 노동조합, 효성물산 노동조합은 서로 합동 교육등을 통해 교류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교류는 대우어페럴 노조위원장의 구속에 대해 이들 노동조합이 동맹파업으로 맞설 수 있는 힘을 제공하였다.<ref>서해문집, 내일을 여는 역사 24호, 2007, 229~230쪽</ref>
 
===노동탄압===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이러한 민주노조 운동을 탄압하였다. 1983년 구로공단의 노동자들은 이러한 독재 정권의 노동탄압과 블랙리스트의 철폐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1984년 3월 10일 노동조합 활동을 이유로 해고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가 결성되어 노동자의 권익 개선을 위한 운동을 시작하였다. 한편, 같은 해 9월과 10월에는 [[전태일]]의 분신을 계기로 창립되었던 [[청계피복노동조합]]의 합법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나기도 하였다.<ref name="서해근현대사"/>
 
이와 같이 노동자들이 [[노동권]]의 보장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커져가던 1985년, 정부가 [[대우어페럴]] 노동조합 위원장이었던 김준용을김준용과 사무국장, 여성부장을 구속하자 구로공단의 노동조합들은 연대 파업을 결의하게 된다.
 
==파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