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정치 파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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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정치파동'''([[1952년]] [[5월 26일]])은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의 재선과 독재정권 기반을 굳히기 위해 [[한국전쟁]] 중에 임시수도 [[부산]]에서 폭력을 동원 강제로 국회의원을 연행하고 구속시킨 일련의 정치적 파행이다.
 
[[1950년]] [[대한민국 2대 총선|3선거30 선거]] 결과 야당이 압승하여 대통령 이승만의 재선이 어려워지자 [[1951년]] [[11월 30일]], 정부는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1952년]] [[1월 18일]] 국회가 이를 부결함으로써 정부와 국회간의 알력이 시작되었다. 이에 정부는 국회해산을 요구하는 '관제민의(官製民意)'를 동원하여 국회의원을 위협하는 한편, [[5월 25일]] 국회 해산을 강행하기 위하여 부산을 중심으로 하여 [[경상남도]], [[전라남도]], [[전라북도]]의 23개 시·군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5월 26일]] 대통령직선제를 강행, 내각제를 주장하는 야당의원 50여 명을 헌병대에 연행([[정헌주]](鄭憲柱), [[이석기]](李錫基), [[서범석]](徐範錫), [[임흥순]](任興淳), [[곽상훈]](郭尙勳), [[권중돈]](權仲敦) 등 12명은 국제 공산당 관련 협의로혐의로 구속)하는 정치파동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부통령 [[김성수]](金性洙)는 [[5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하고 사표를 제출하였다.
 
정치파동에 대한 국제적 비난여론이 쇄도하자 대통령 이승만은 [[6월 4일]] 국회해산을 보류한다고 표명하였으나, [[6월 20일]] 부산국제구락부에서 야당과 재야 인사들이 반독재호헌구국선언을 하는 회의장에 괴한이 습격하여 피습당하는 일(국제구락부사건)이 일어났으며, [[6월 25일]]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또한 [[6월 30일]] 민중자결단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하고 80여 명의 국회의원을 연금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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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운데 국회의원 [[장택상]](張澤相)을 중심으로 한 신라회(新羅會)가 주동이 되어 대통령직선제 정부안과 내각책임제 국회안을 발췌, 혼합한 〈발췌개헌안〉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7월 4일]] 경찰과 군인들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가운데 국회의원들은 기립투표방식으로 출석의원 166명 중 찬성 163표, 반대 0표, 기권 3표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이승만 독재정권의 기반이 굳어졌다.
 
이 당시 헌병대가 국회원들이국회의원들이 탄 버스를 통째로 끌고 사라지는 모습은 이 사건을 상징하는 유명한 사진으로 남아있다.
 
[[분류:제1공화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