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가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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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글 →‎생애: 시흥군 군자면 정왕리 → 시흥시 정왕동, 유구면 → 유구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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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丙子)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몽진하였으나 청나라 군대에게 포위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복동생 [[광성군]](廣城君) [[이제길]](李悌吉)과 논의하고, 이에 전 찰방 [[원성모]](元成模), 전 첨절제사 [[장운상]](張雲翔), 사인 [[원이길]], 무인 [[원영길]], 주부 [[홍요경]](洪堯儆), 장사 [[기득윤]](奇得胤) 등이 서로 약속하여 맹세하고 의병을 모으니 모두가 공과 이복동생 [[광성군]](廣城君) [[이제길]](李悌吉)을 추대하여 선봉장으로 삼아 남한산성에 다다라서 왕을 배알할 계책을 세웠다.
 
[[1637년]](인조 15) [[1월 7일|1월 초7일]] 길에서 적을 만나 반나절의 교전 끝에 죽이고, 빼앗은 것이 매우 많았으며, 행재소에 노획한 병기를 바치려 하였으나 적의 병사에 의해 길이 막혀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이에 부대를 교외에 주둔하여 기회를 살펴 수로를 이용하여 강화도에 이르고자 하였다. 이해 [[1월 13일]]에 청나라 군대가 사방에서 일어나고 산처럼 모여드니 중과부적으로 대적할 수 없어 안산으로 급히 후퇴하여 오이도 덕물 섬에 웅거하였다.
 
잠시 후 적진의 추격이 있었으며, 사방에서 함께 공격받고, 적군의 화살은 비 오듯 하는데 구원군도 없었음으로 이복동생 광성군과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였다.<ref>광성군이제길행장</ref> 이때 향년 39세였다. 묘소는 경기도 시흥군 군자면 정왕리에 있었으나 안산시 도시계획으로 충남 공주시 유구면 동해리 산록에 이장하였다.
 
이때 공으로 승헌대부(承憲大夫) 영가군(永嘉君)에 추봉되었다. 후사(後嗣)가 없어 경자(庚子) [[1900년]](광무 4) [[대한제국 고종|고종황제]] 명으로 [[조선 선조|선조]]의 6남 [[순화군]](順和君)의 7대손 [[이춘소]](李春沼)에게 봉사(奉祀)하게 하였다.
 
잠시 후 적진의 추격이 있었으며, 사방에서 함께 공격받고, 적군의 화살은 비 오듯 하는데 구원군도 없었음으로 이복동생 광성군과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였다.<ref>광성군이제길행장</ref> 이때 향년 39세였다. 묘소는 [[경기도]] 시흥군[[시흥시]] 군자면 정왕리에정왕동에 있었으나 [[안산시]]의 도시계획으로 인해 [[충청남도|충남]] [[공주시]] 유구면유구읍 동해리 산록에 이장하였다.
 
이때 공으로 승헌대부(承憲大夫) 영가군(永嘉君)에 추봉되었다. 후사(後嗣)가 없어 경자(庚子) [[1900년]](광무 4) [[대한제국 고종|고종황제]] 명으로 [[조선 선조|선조]]의 6남 [[순화군]](順和君)의 7대손 [[이춘소]](李春沼)에게 봉사(奉祀)하게 하였다.
 
==가족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