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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주의|식민지 시대]] 초창기에 [[네덜란드]]와 [[잉글랜드]] 두 [[개신교]] 국가가 식민지 정복 활동을 넓혀가면서 원주민들에게 자신들의 종교적 신앙을 보급해나가자, 교황청에서는 상업제국의 결과물로서 프로테스탄티즘이 확장하는 것에 대해 매우 실질적인 위협으로 인식하였다. 1648년, [[30년 전쟁]]의 종식과 더불어 유럽 그리스도교 세계의 교파적 균형이 공식적으로 확립되어 영구히 정착하였다. 그러나 당시 유럽인들에 의해 탐험이 되고 있었던 광활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 지역들은 새로운 복음화 장소로 떠올랐다.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의 치세(1572-1585) 때부터 이미 포교성성과 관련하여 비공식적으로 설립한 추기경 위원회가 존재하였는데, 주로 [[그리스인]], [[슬라브인]], [[시리아인]], [[이집트인]], [[아비시니아인]] 등 오랜 역사를 가진 동방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들과 로마의 일치를 진행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전통적으로 가톨릭교회의 목표였다. [[교리문답]]들은 여러 언어로 출판되었으며 신학생들은 [[말라바르]]와 같이 먼 곳까지 파견되었다. 가장 구체적인 성과는 현재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에 대부분 집중된 [[루테니아]] 가톨릭 공동체가 로마에 귀일한 사건이다. 두 조직의 합일은 1508년 [[브레스트 (벨라루스)|브레스트]]에서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다음해 그레고리오 15세가 선종하였지만, 포교성성의 역할은 중단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포교성성의 초창기 13명의 위원 가운데 한 사람인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교황 우르바노 8세|우르바노 8세]](1623-1644)로서 후임 교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교황 우르바노 8세 치하에 선교사 양성을 위한 중앙 신학교(''Collegium urbanum'')가 설립되었다. 포교성성은 또한 로마에서 인쇄기를 가동하여 여러 나라 언어로 된 교리문답집들을 발행하였다. 포교성성의 총무들은 1705년부터 주로 [[중국]]에서 [[마카오]]와 [[광저우|광둥]]을 오가면서 활동하다가 최종적으로 1842년에 [[홍콩]]에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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