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보쿠초 시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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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 시대 말인 [[1246년]] [[고사가 천황]]의 퇴위 후의 천황가는 황위계승을 둘러싸고 다이가쿠지 계통(大覚寺統)과 지묘인 계통(持明院統)로 분열되었다. 이에 [[가마쿠라 막부]]가 개입하여 다이가쿠지 계와 지묘인 계가 번갈아 가며 황통을 계승하는 것으로 양측을 종용했다.
 
[[1333년]] 다이가쿠지 계의 [[고다이고 천황]]은 전국의 무사들에게 막부 타도의 윤지를 보내 도막운동을 시도한다. 이에 응한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닛타 요시사다]]의 가세로 가마쿠라 막부를 멸하고, 겐무 신정(建武の新政)라고 불리는 [[고다이고 천황에천황]]에 의한 친정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정국의 혼란은 계속되었고,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 때문에 무사계급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구 막부 세력이 [[나카센다이의 난]]을 일으키자, 다카우지는 천황의 칙서를 받지 않은 채 무단을무단으로 난을 진압했고, 친정에 대한 반기를 들었다. 이에 불만이 있던 무사들도 가세하였다. 이에 [[고다이고 천황은천황]]은 [[닛타 요시사다와요시사다]]와 [[기타바타케 아키이에]]에게 다카우지의 토벌을 명령했다. 닛타 군은 [[하코네·다케노시타 전투]]에서 패배였고, 이 기세를 몰아 다카우지는 교토로 입경했다. 하지만, 오슈의 [[기타바타케 아키이에가아키이에]]가 군을 이끌고 교토로 입경하였고, [[구스노키 마사시게]], [[닛타 요시사다]] 군도 가세하였기 때문에 다카우지는 교토에서 축출되었다. 이에 다카우지는 [[규슈]]로 내려가 세를 수습한 후, [[다타라하마 전투]]에서 천황측에 승리한다. 때마침 지묘인 계의 [[고곤 천황|고곤 상황]]의 명령을 받을어 교토로 진군한다. 이에 맞서는 조정군은조정 군은 [[닛타 요시사다와요시사다]]와 [[구스노키 마사시게]]가 [[미나토가와 강 전투]]에서 패배하여 [[히에이 산]]으로 퇴각한다.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천황과의천황]]과의 화의를 맺고, [[삼종의 신기]]를 건네받하건네받아 지묘인 계의 [[고묘 천황]]을 옹립한 직후, [[건무식목]](建武式目)를 제정하여 정책방침을 정하고 정식으로 [[막부]]를 연다. [[고다이고 천황은천황]]은 교토를 탈출하여 요시노로 달아나 “북조에 넘긴 신기는 가짜이며 [[고묘 천황의천황]]의 황위는 정통성이 없다.”라고 주장하며 요시노에 남조를 열어, [[호쿠리쿠]]와 [[규슈]] 등 각 지방에 자신의 황자를 파견해 후위를 도모한다.
 
=== 간노의 소란과 남조세력의 쇠퇴 ===
남조측은 [[나와 나가토시]], [[유키 지카미쓰]], [[지구사 다다아키]] 이외에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닛타 요시사다]]가 [[1338년]]까지 연이어 전사하자, 군사적으로 북조측이 압도적 우위에 서게된다. [[1348년]] [[시조나와테 전투]]에서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적장자 [[구스노키 마사쓰라]], [[구스노키 마사토키|마사토키]] 형제가 아시카가측의 [[고 모리나오모로나오]]에게 토벌되토벌되어, 요시노 행궁(吉野行宮)이 함락되자 [[고무라카미 천황]]과 남조의 가신들은 아노(賀名生)(현 [[고조 시]])로 피신하였고, 점차 북조로 기울어져 갔다. 하지만 그 후, 정무를 맡고 있었던 다카우지의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와 아시카가 가문의 집사인 [[모리나오와의모로나오]]와의 마찰이 심화되었고, [[간노]] 연간 다다요시파와 반 다다요시파 간의 [[간노의 소란]]이 일어난다. 정쟁에서 패한 다다요시는 남조에 귀순하여 다카우지의 자식이며 다다요시의 양자인 [[아시카가 다다후유]]도 양아버지를 따라 규슈로 도망쳐 북조와 싸우게 된다. 또, [[야마나 도키우지]] 등 [[슈고]]의 일부도 남조편에 서서 대항하자, 남조는 다시 활기를 띠게 된다. [[고무라카미 천황]]은 스미요시 신사의 신관 가문인 쓰모리 가문의 저택을 [[스미요시 행궁]](住吉行宮)으로 삼아 거처를 옮긴다.
 
[[1351년]]에는 다카우지가 다다요시파에 대항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남조에 항복한다. 이에 의해 다카우지는 [[정이대장군]]에서 해임되었다. 남조는 이를 기회로 삼아 교토로 진격해 교토에 있던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를 몰아내고 신기를 회수한다. 요시아키라는 북조 [[연호]]를 부활시켜, 다시 교토를 탈환하지만 남조는 물러날 때에 고곤, 고묘 상황과 천황에서 퇴위한 [[스코 천황]]을 아노로 끌고갔다끌고 갔다. 이 때문에 북조는 고곤의 아들이며 스코의 동생인 [[고코곤 천황]]을 신기 없이 즉위시키고, 아울러 공무의 관직을 전상태로 되돌렸으며 다카우지도 정이대장군직에 복귀하였다.
 
남조의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는 [[간토 지방]]에서의 남조세력의남조 세력의 결집을 꾀하고자, [[히타치노쿠니|히타치 국]] [[오다 성]]에서 남조의 정통성을 나타내는《[[신황정통기]]》를 집필한다. [[1339년]]에 [[고다이고 천황이천황]]이 죽자 지카후사가 남조의 지도적 인물이 되었지만, 지카후사도 [[1354년]]에 죽자 남조는 다시 쇠퇴하였고, 막부내에서의 항쟁으로 실각되었던 [[호소카와 기요우지]]가 남조에 귀순하여 [[구스노키 마사노리]]와 함께 일시적으로 교토를 점거하였지만, [[1367년]]에 패한 이후로 대규모의 남조의 공세도 없어져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대에는 [[오우치 히로요]]와 [[야마나 도키우지]]등도 북조에 귀순한다. 요시아키라의 사후의 아시카가 막부는 어린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를 보좌한 관령(管領) [[호소카와 요리유키]]의 지도에 의해, 남조측의 중심적 무장이었던 [[구스노키 마사노리를마사노리]]를 귀순시키는 등 활약하여 막부체제를 확립시킨다.
 
=== 규슈의 정세와 남북조통합까지 ===
규슈 지방에서는 [[다타라하마 전투]]에서 아시카가 측에 패한 기쿠치 가문 등의 남조세력과남조 세력과 다카우지를 지지하는 [[잇시키 노리우지와노리우지]]와 [[니키 요시나가]] 등의 북조세력이북조 세력이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규슈의 남조세력을남조 세력을 도모하기 위해 [[고다이고 천황은천황]]은 아들 [[가네나가 친왕]]을 정서장군(征西将軍)으로 봉해 파견하였다. [[지쿠고 강 전투]]에서 [[가네나가 친왕]], [[기쿠치 다케미쓰]], [[우쓰노미야 사다히사]] 등의 남조세력과남조 세력과 [[쇼니 요시나오]], [[오토모 우지토키]], [[우쓰노미야 후유쓰나]] 등의 북조세력이북조 세력이 싸웠고, 그 수는 10만에 헤아른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패한 북조측은 [[다자이후]]로 도주했고, 이후 10년 정도 규슈는 남조가 지배하였다.
 
또, [[간노의 소란]]이 일어나자 [[아시카가 다다후유]]가 가세하여, 세 세력이 항쟁하는 정립상태가 된다. 이 무렵 한반도와 중국대륙 연안에서 [[왜구]] 출몰하기 시작해, [[가네나가 친왕은친왕]]은 왜구의 단속을 조건으로 [[명나라|명]]의 책봉을 받았고,“일본국왕”으로서의 권위를 토대로 세을세를 다졌다. [[무로마치 막부]]는 [[이마가와 사다요]]를 규슈에 파견하여 남조세력을남조 세력을 제압했고, 다다후유도 막부에 굴복하였기 때문에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대에는 규슈도 막부의 지배를 받았다. 그 후, [[아시카가 요시미쓰도요시미쓰]]도 새로이 명의 책봉을 받아“일본국왕”이 된다.
 
[[1381년]] ~ [[1386년]] 동안에, 남조는 동란초기부터동란 뒷바침하던초기부터 뒷받침하던 [[가네나가 친왕]], [[기타바타케 아키요시]], [[무네요시 친왕]] 연이어 죽자, 대북조 강경노선을 고수하던 [[조케이 천황]] 즉위하고부터 정권이 심하게 흔들렸지만, 1390년대 초기, [[아시카가 요시미쓰에요시미쓰]]에 의해 남조를 지지하는 유력 [[슈고 다이묘]] 세력소멸하였고세력들이 소멸하였고, 이로 인해 남조는 북조에 저항할 수단을 대부분 잃게 되었다. 이 같은 정세 속에 [[1392년]] [[아시카가 요시미쓰의요시미쓰]]의 알선으로 천황가의 다이가쿠지 계와 지묘인 계가 황위를 번갈아가며 계승할 것과 전국의 [[고쿠가]] 령(国衙領)을 다이가쿠지 계의 소유로 삼을 것을 조건으로, 남조의 [[고카메야마 천황]]이 북조의 [[고코마쓰 천황]]에게 3종 신기를 넘겨 남북조가 통일되었다. 이 시기 고쿠가 령의 토지은토지는 거의 조금밖에 없는 상태였다.
 
[[분류:난보쿠초 시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