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풍’81: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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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행 ==
'새 歷史(역사)를 創造(창조)하는 것은 靑年(청년)의 熱(열)과 意志(의지)의 힘이다'라는 캐치프라이즈를 걸고 [[여의도광장]]에서과 고수부지에서 5일간 밤낮없이 행사가 진행되었다. 행사가 열리는 여의도 일대는 차 없는 거리로 지정되었고, 행사 기간 동안 [[야간통행금지]]도 일시 해제되었다. 행사에는 전국 198개 대학의 6천여 명의 학생과 일반인 7천여 명이 참가하여 민속 문화를 중심으로 한 각종 공연·대회·축제·장터 등이 진행·운영되었다. 행사에 동원된 인원은 16만명이었고, 5일간 행사를 보기 위해 여의도를 찾은 인원은 1000만명에6백만명(본부측 추산1000만명)에 달했다.<ref>國風人波延千萬... 대학생「熱氣5日」 주도의오늘밤 참여와 민속문화를閉幕, 널리 알리려는 기존의 취지와 달리《경향신문》, 참여자의 1981.6.1.</3이 일반인이었고ref> 민속문화보다는 야간에 있었던 가요제가 더욱 큰 인기를 끌었다.
 
== 평가 ==
행사 직후 언론사의 보도에서 대규모 군중 집회의 허용과 민족문화에 대한 자각이 긍정적으로 평가되었으나, 고유 문화의 원형보존의 노력이 부족하고, 농번기 행사로 시기 선택이 부적절하였으며, 규모에 따른 막대한 비용과 질서 유지의 문제 등이 있었음이 지적되었다.<ref>우리 民俗 熱氣 5日 「國風81」 取材기자 放談, 《경향신문》, 1981.6.2.</ref><ref>「國風81」, 《동아일보》, 1981.6.2.</ref> 국회에서는 대학생들의 참여가 적었음이 지적되었고, 이듬해 열린 민속학자 심포지엄에서는 국풍81은 현장의 자연민속을 파괴할 수 있는 ‘모조 민속’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ref>판치는 「模造民俗」, 《동아일보》, 1982.9.9.</ref>
 
== 국풍81 출신 가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