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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리지'''》(擇里志)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이 [[1751년]]([[조선 영조|영조]] 27년)<ref name="yoksa"> [http://yoksa.aks.ac.kr/jsp/cc/View.jsp?cc10id=C0000646&keywords=%E6%93%87%E9%87%8C%E5%BF%97%20%ED%83%9D%EB%A6%AC%EC%A7%80 한국역사정보 통합시스템] </ref>에 저술한 인문 지리서이다. 팔역지(八域誌) · 팔역가거지(八域可居地) · 동국산수록(東國山水錄) · 동국총화록(東國總貨錄) · 형가승람(形家勝覽) · 팔도비밀지지(八道秘密地誌) 등 여러 이름으로 전해 오고 있다.<ref name="yoksa" /> 어떤 지리적 요건을 갖춘 곳이 살기에 좋은 곳인지를 실학적 입장에서 저술하였다.
 
{{lang||{{lang||}}}}요약
== 내용 ==
조선시대 1751년(영조 27)에 실학자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1690~1756)이 저술한 지리서.
이 책의 내용은 대체로 전반의 〈팔도총론(八道總論)〉과 후반의 〈복거총론(卜居總論)〉의 2편으로 나누어진다. 〈팔도총론〉에는 조선 전토를 팔도로 나누어 그 지방의 지역성을 출신 인물과 결부시켜 밝혔고, 〈복거총론〉에는 살 만한 곳을 입지조건을 들어 설명하였다. 전자는 지방지지(地方地誌)에, 후자는 인문 지리적 총설에 해당한다. 전반에서는 특히 [[사람]]과 [[자연환경]]과의 관계를 중시한 지인상관론(地人相關論)을 설파했으며, 후자에서는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 다음과 같은 입지조건을 들고 있다. 첫째 지리적 조건을 들었으며, 둘째 생리(生利)를 들었다. 셋째로는 인심을 들었으며, 넷째로 산수의 경치가 좋은 것을 들었다. 끝에 가서 해거(海居)·강거(江居)·계거(溪居)의 세 곳을 비교하여 말하였다.
구분 지리서
저자 이중환
시대 조선시대(1751)
소장 규장각 등
본문
《박종지(博綜誌)》라고도 한다. 필사본. 1책. 규장각 등에 소장. 저술 당시에는 책의 이름이 정해지지 않았으며 뒤에 이긍익(李肯翊)이 이를 《팔역복거지(八域卜居志)》라 하였는데, 약칭하여 《팔역지(八域志)》라는 이명(異名)이 생겼다. 《택리지》라는 이름도 후인들이 그 내용을 보고 붙인 이름인 듯하다.
 
책의 내용은 <팔도총론(八道總論)>과 <복거총론(卜居總論)> 2편으로 나누어서 서술하였는데 <팔도총론>에서는 전국을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 8도로 나누어 그 지리를 논하고 그 지방의 지역성을 출신인물과 결부시켜서 서술하였다(地人相關).
 
<복거총론>에서는 살기 좋은 곳을 택하여 그 입지조건을 들어 타당성을 설명하였다. 사람이 살 만한 곳의 입지조건으로서 지리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 등 4가지를 들었으며, 여기에도 여러 가지로 구별하여 가거지류(可居地類) ·피병지(避兵地) ·복지(福地) ·은둔지(隱遁地) ·일시유람지(一時遊覽地) 등으로 분류하였다.
 
<팔도총론>은 지방지(地方誌)에, <복거총론>은 인문지리적 총설에 해당된다.
 
내용 여러 곳에 풍수지리설이 인용되었으며 이 책의 특징으로는 ① 한국 사람이 저술한 현대적 의미의 지리서라는 점, ② 실생활에서 참고와 이익을 주도록 저술된 점, ③ 근대 한국의 지리학과 사회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 외국에서도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
 
1910년 고서간행회, 1912년 광문회(光文會)에서 각각 인쇄 ·간행하였다.
 
필사본
 
사본(寫本) ·수서본(手書本) ·서사본(書寫本) ·초사본(鈔寫本:중국) 등 여러 용어가 있으며, 인쇄술이 발달하여 사본형태의 책이 잘 만들어지지 않으면서는 원본을 베낀 책이나 서류 등을 아울러 이르게 되었다. 필사본은 활자에 의한 활자본(또는 印本), 목판에 의한 판본(판각본) 등과 구별해서 쓰이며, 한꺼번에 많은 부수의 동일한 책이 되지 않는 데 그 특성이 있는, 인쇄술 발명 이전의 출판형태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파피루스에다 갈대 펜 ·새 깃털 펜으로 글을 써서 권자본(卷子本:두루마리)을 만들었으며, 수서(手書)를 업으로 하는 사자생(寫字生:scribe)도 있었다. 파피루스에 대신해서 양 ·송아지 등의 가죽이 수서의 재료가 되면서 지금과 같은 서적의 원형이라 할 책자가 나오고, 그리스도교 문화가 번성하게 된 중세에는 각 수도원에 사자실(寫字室)이 설치되어 성경류의 수서를 하였다.
 
이와 같은 수서는 수사(修士)의 임무로서 각자가 일을 분담해서 매일 일정한 시간 성전의 사본을 만들었다. 이들은 한 사람이 가죽을 다루어 부드럽게 다듬으면, 그 다음 사람은 이 가죽을 경석(輕石)으로 문지르고, 셋째 사람은 여기에 원본을 옮겨 쓰고, 넷째 사람은 두문자(頭文字) 및 장식 그림을 그리고, 다섯째 사람은 세밀화(細密畵)를 그리며, 여섯째 사람은 원본을 보고 교정을 하고, 일곱째 사람은 제본을 하였다.
 
중국에서 비롯된 제지법(製紙法)이 지중해 연안의 여러 나라에 전하여진 후에도 필사본의 출판형식은 이루어졌고, 활자인쇄본이 나오게 된 후에도 끊이지 않았다. 2세기 초에 제지법을 완성한 중국에서는 그때까지 대나무 등을 재료로 하였던 간책(簡冊)의 원본을 종이에 옮겨 써서 책을 만드는 필사본제작이 성행하였으며, 목판인쇄술이 이루어진 후에도 필사본의 전통은 끊이지 않았다. 현존하는 저명한 필사본으로는 《파피루스 프리스》 《해리스 파피루스》 《사해문서(死海文書)》 《코튼본(本) 창세기》 《아르킨본(本) 성서》 《성(聖) 마가레트의 성서》 등이 있다.
 
한국에도 한자(漢字)의 전래와 함께 필사본에 의한 불경의 출간 등이 이루어졌으나, 현존하는 것이 귀하여 자세하지 않고, 인쇄술이 발달하기 이전의 저술은 필사본으로 전승되다가 그 후에 다시 인쇄되었다. 필사본은 학자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분류되는데 일반적으로 고본(稿本) ·전사본(傳寫本) ·사경(寫經)으로 나눌 수 있다.
 
저자나 편자가 처음으로 쓴 책을 고본이라 하며, 초본(草本) ·초고본(草稿本) ·원고본(原稿本)이라고도 한다. 고본은 문헌 또는 사료로서 일차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저자 자신이 직접 쓴 것을 자필고본(自筆稿本) 또는 수고본(手稿本)이라 하여 더욱 중요시한다. 고본은 여러 차례 수정하는 경우도 있는데, 가장 먼저 작성한 것을 초고본(初稿本) ·초초본(初草本)이라 하고, 초고본을 수정한 경우 재고본(再稿本) ·중초본(重草本)이라고 하며, 여러 번 고쳐서 차례를 알 수 없는 경우는 개고본(改稿本) ·개수본(改修本)이라고 한다.
 
그리고 고본을 마지막으로 손질하여 완성된 것을 정고본(定稿本) ·정초본(正草本)이라고 하고, 바른 글씨체로 정서한 것을 정서고본(淨書稿本)이라 하며, 목판이나 석판에 새기기 위하여 쓴 것을 판하서(板下書)라고 한다. 간행된 고본을 기간고본(旣刊稿本)이라 하며 간행본의 잘못된 곳을 교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고, 간행되지 않은 고본은 미간고본(未刊稿本)이라고 하는데 사료적인 가치가 크다.
 
저자가 직접 쓴 고본과는 달리 베껴 쓴 책을 전사본(傳寫本) ·전초본(傳鈔本) ·이사본(移寫本)이라고 한다. 전사본은 사료적인 가치는 크지 않으나, 원고본이나 간행본이 없는 경우 등은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전사본 중 대본을 그대로 모방하여 쓴 것을 모사본(模寫本) 또는 모본(摹本)이라고 하며, 모사본 중 대본의 형태와 똑같이 투사(透寫)하여 만든 책을 영사본(影寫本) ·영초본(影鈔本)이라고 한다. 대개 귀중본을 전사할 때 이 방법을 사용한다. 글씨를 배우기 위해 서첩(書帖)을 만들 경우 모방하여 쓴 것을 임사본(臨寫本) ·임모본(臨摹本) ·임본(臨本)이라고 한다.
 
끝으로 사경(寫經)은 단순히 학습이나 연구를 위한 필사와는 달리 신앙의 차원에서 경문이나 그림을 그려 만든 것을 말한다. 주로 백지(白紙) ·감지(紺紙) ·상지(橡紙)에 먹물이나 금 ·은가루를 가지고 썼다. 한 사람이 쓴 일필경(一筆經)과 여러 사람이 쓴 각필경(各筆經)이 있다.
 
규장각
 
내각(內閣)이라고도 한다. 정조(正祖)가 즉위한 1776년 궐내(闕內)에 설치, 역대 국왕의 시문, 친필(親筆)의 서화(書畵)·고명(顧命)·유교(遺敎)·선보(璿譜:王世譜)·보감(寶鑑) 등을 보관 관리하던 곳이다. 규장각의 명칭은 1464년(세조 10) 양성지(梁誠之)가 헌의(獻議)한 일이 있고, 1694년(숙종 20)에는 종부시(宗簿寺)에 예속된 어제(御製)·어필(御筆)을 보관하는 한 소각(小閣)의 각명(閣名)으로 쓰기도 하였으나 곧 폐지되었다. 정조는 즉위하자 곧 창덕궁(昌德宮)의 북원(北苑)에 새로 집을 짓고 고사(故事)를 따라 규장각이라 명명(命名), 직제(職制)를 갖춘 한 독립된 기구로서 국립도서관의 기능을 가지게 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목적은 단순히 역대 국왕의 어제·어필을 보관하는 일뿐만 아니라, 당시왕권을 위태롭게 하던 척리(戚里)·환관(宦官) 들의 음모와 횡포를 누르고, 건국 이래의 정치·경제·사회 등의 현실문제의 해결은 곧 학문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판단, 국가적 규모로 도서를 수집하고 보존 간행하는 데 있었다.
 
정조는 당색(黨色)을 초월하여 학식이 높은 사람을 모아 우대하였고, 그들 학자들은 조선왕조가 지니고 있던 구조적(構造的)인 모순에 대한 비판과 재검토를 하였다. 정조는 세손(世孫)으로 있을 때부터 정색당(貞堂)이라는 서고(書庫)를 지어 도서수집에 전념하였으며, 명나라에서 기증해 온 중국본을 모았으며, 또 입연사절(入燕使節)을 통하여 새로운 서적을 구입하기도 하였다. 부속기구로서 서고(西庫)와 열고관(閱古館)을 두었으며, 서고에는 조선본, 열고관에는 중국본을 나누어 보관하였고, 열고관의 도서가 늘어남에 따라 다시 개유와(皆有窩)라는 서고를 증축하였다.
 
규장각의 도서는 1781년(정조 5)경에 장서 정리가 되면서 총 3만여 장서의 도서목록이 서호수(徐浩修)에 의하여 작성되어 이를 《규장총목(奎章總目)》이라 하였다. 규장각은 도서를 수집하고 보존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그와 함께 도서를 편찬하는 데도 힘을 기울여 많은 책을 편찬하였다. 그 중에서도 매일매일의 정사(政事)를 기록한 《일성록(日省錄)》은 대표적인 것으로, 정조 때 편찬하기 시작한 이 편년체(編年體) 사서(史書)는 한말(韓末)까지 계속되었다.
 
규장각은 1894년 갑오개혁 때 궁내부(宮內府)에 두었다가 이듬해인 1895년 규장원(奎章院)으로 고쳐 이때 한·중 양국본의 도서와 각종 왕가 전보(傳寶)를 보관하였으며, 1897년(고종 34) 다시 규장각으로 이름을 환원시켰다. 규장각에는 제학(提學:종1∼정2품) 2명, 직제학(直提學:종2품∼정3품 당상관) 2명, 직각(直閣:정3∼종6품) 1명, 대교(待敎:정7∼9품) 1명 외에 검서관(檢書官) 4명 등의 관원이 있었다. 이 중에서 특히 검서관에는 종래 임용되지 못하던 서얼(庶孼)도 등용하여 서적의 교정과 서사(書寫)를 맡기어 5품에 해당하는 군직(軍職)을 주었다.
 
규장각은 교서관(校書館)을 외각(外閣)으로 편입시켜 경서(經書)와 사적(史籍)을 인쇄·반포하였으며, 1907년 제실(帝室)의 문한(文翰)·기록을 보관하였다.
 
1908년 근대적인 직제(職制)를 편성하여 전모(典謀)·도서·기록·문서 등 4과가 사무를 집행하였으며, 이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각 관서의 일기 및 등록과 정족(鼎足)·태백(太白)·오대(五臺)·적상(赤裳) 등의 사고(史庫) 장서까지 관할하였다. 1910년 국권피탈로 그 이름이 없어지고, 소장되어 있던 도서는 한때 이왕직(李王職)에 도서실을 두어 보관하고 있었으나 1911년 조선총독부 취조국(取調局)으로 넘어갔다. 이때 넘어간 도서는 5,353부 10만 187책, 각종 기록은 1만 730책에 달하였다.
 
그러나 1912년 총독부에 참사관실(參事官室)이 설치되어 이들 도서와 관련된 사무는 참사관실로 이관되었고, 1922년 학무국으로 이관되었다가, 다시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으로 이관되었는데, 이때 15만 1519권의 책이 이 대학의 도서관으로 옮겨졌다. 이 책들은 광복 후 서울대학교에서 인수하여 관리하고 있다.
 
지리학
 
그리스어(語)에서 기원한 ‘지오그라피’는 각지의 자연 ·인문 ·사회에 관한 기술을 뜻하며, 지리학은 그 기초적 학문 연구이다. F.리히트호펜이 지리학을 콜로로기(地誌的 科學)라고 그 성격을 규정지은 것은 의미심장하다. 지리학은 일찍 발달한 과학 중의 하나로 만학(萬學)의 조상이라고 하였으나, 고전적 지리학과 근대 지리학과의 성격적인 차이는 있다. 최초의 지리학자로 알려진 그리스의 에라토스테네스는 처음으로 지구의 크기를 측정하였다. 로마시대에 톨레미는 기후대를 구별한 세계지도를 정리하였다. 지지학(地誌學)에서는 스트라본이 나와서 고대 로마의 판도(版圖)에 대한 지식이 알려졌다.
 
중세 암흑시대에는 아라비아인(人)인 이븐 하우칼이나 이븐 바투타 등이 여행기를 저술하였다. 대발견시대에 이어 지리학적 탐험시대가 되었으며 B.바레니우스는 《일반지리학》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고대지리학을 근세로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하였다. 19세기에 들어와서, 훔볼트와 K.리터가 출현하여 지리학의 기초를 세웠다. 그들은 자연 및 사회현상의 장소에 따라 다른 특색을 현지에서 측정하고, 이들 현상의 상호관계를 발견하여 세계(地表面)를 구성하는 여러 지역의 체계를 밝혔다. 그 뒤 독일에서는 베첼, 리히트호펜, F.라첼 등 많은 연구자가 배출되었으며, 프랑스에서는 비달 드 라 브라슈, 두마르톤 등이 지지연구와 원리적 연구를 깊게 하였다.
 
다른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에서도 지리학은 대학의 주요 강좌가 되었으며, 왕립 런던 지리학회를 비롯하여 주요국의 학회 ·협회가 발달하였다. 국제지리학연합 ·측량부 ·수로부 ·지지연구소 등의 조직이 지리학에 공헌하였다. 지리학은 세계에 있는 일반적 ·원리적 연구에 종사하는 계통지리학과, 개개의 지역연구에 종사하는 지지학으로 분류되는데, 전자는 다시 자연지리학 ·인문지리학 등으로 세분된다. 지도 ·통계 ·항공사진 등은 연구에 없어서는 안될 유력한 자료이다. 최근 개발 ·재해 ·토지이용 ·도시계획 ·공업입지 등 응용분야가 널리 개척되었다.
 
사회학
 
19세기 전반 A.콩트 ·H.스펜서 등에 의해 학문적으로 확립되었다.
 
처음에 이들은 사회학을 사회연구의 유일한 과학으로 보고, 사실상 이들 사회과학 자체와 동일시하였다. 이 견해는 19세기 후반 이후로 과학의 전문적 분화가 진행됨에 따라 부정되었으며, 사회학은 사회과학의 한 종류에 지나지 않는다고 판단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그것이 대상적으로 사회전체에 대한 종합적 인식을 목적으로 하느냐, 또는 특정부분의 분석적 인식을 목적으로 하느냐에 따라, 종합사회학과 특수과학적 사회학의 두 전형으로 구분된다.
 
사회학은 과학적 방법을 채택하고 있는 점에서는 사회철학과 구별되지만 그 중에는 자연과학을 모방하려는 것도 있고, 반대로 이해(理解)를 그 특징이라 하여 강조하는 것도 있기 때문에, 방법적으로 완전한 일치는 없다.
 
이처럼 사회학은 대상적 ·방법적으로 다소 통일되지 않는 감을 주고 있으나, 학문적 형태는 정비되었다.
 
보편화된 인식을 목적으로 하는 일반사회학, 개별화된 인식을 목적으로 하는 역사사회학, 실천적 응용을 목적으로 하는 응용사회학의 세 부문으로 이루어지는 중심적 조직이 있다. 그 밖에 다른 특수 사회과학의 연구영역을 사회학적으로 고찰하는 각종 특수사회학(예:경제사회학 ·정치사회학 ·지식사회학 등)이 있다
 
광문회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라고도 한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정치적으로 다난했던 시기에 학자들의 국민계몽을 위한 활동이 컸다. 그들은 애국적인 견지에서 독립정신을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지식을 널리 전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따라 국사연구도 민족적인 기개(氣槪)와 자존심을 앙양하기 위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광문회에서는 한국의 고전을 발굴하고 그 가치를 재인식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한국고전을 간행·보급시키는 한편, 민족의 정신적 결합을 기하며 민족문화와 사상의 기원에 관한 연구에 종사하였다.
 
최남선(崔南善)이 창설하고 박은식(朴殷植) 등이 관계하였으며, 《동국통감(東國通鑑)》 《해동역사(海東繹史)》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경세유표(經世遺表)》 《상서보전(尙書補傳)》 등 17종의 《조선총서(朝鮮叢書)》를 간행하였다.
 
==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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