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즈버그 전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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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 포토맥군 - [[게티즈버그의 북군 전투 서열]] 참조
 
== 게티즈버그 전역 기간 중 벌어진 전투 ==
== 전투들 ==
다음은 게티즈버그 전역 기간 중 벌어진 전투다.
 
;=== [[브랜디 역 전투]] ([[6월 9일]])===
: 전쟁 중 가장 큰 규모로 치러진 [[기병대]]간의 전투다<ref>[http://brandystationfoundation.com/pages/battle.htm Brandy Station Foundation]. 20,500명이 참전하였는데, 그중 약 3,000명이 북군 보병이었다. 1864년 트레비란 역 전투는 [모두] 기병의 전투로써 최대였다. [http://www.civilwar.org/landpreservation/l_accomplishments.htm Civil War Preservation Trust]에 의거한다면, 브렌디역 전투는 이 종류의 전투로써는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최대의 전투였다. </ref>. [[알프레드 플리슨튼]] 소장이 지휘하는 북군 기병대가 [[브랜디 역, 버지니아 주|브랜디 역]] 근교에 주둔하고 있던 [[젭 스튜어트]]를 새벽에 기습 공격한 것이다. 플리슨튼의 기병대는 리의 북버지니아군의 동향을 파악하고자 강행 정찰 중이었다. 근처에 있던 리의 보병 부대의 위치를 찾아내기 전에 플리슨튼이 후퇴하긴 했지만, 이 전투의 승패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북군 기병대로부터 기습을 당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스튜어트는 자존심이 상했고, 명예와 자존심을 회복하겠다며, 독단으로 북군 후방으로 침투하게 된다. 이것이 나중에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남군에 좋지 않은 영향을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브랜디 역 전투는 북군 기병대의 명성을 남군 기병대 못지않게 세워줬다. 한편, 브랜디 역 전투 후, 이월의 2군단이 마나서스 갭에서 [[블루리지 산맥]]을 넘어 북쪽으로 기동했다.
 
; ===[[2차 윈체스터 전투]] ([[6월 13일]] ~ [[6월 15일]])===
: 이월 군단은 남군이 블루리지 산맥을 건너 북쪽으로 기동할 수 있도록 [[로버트 밀로이]] 소장이 지휘하는 윈체스터 수비대를 격파하고[[셰넌도어 계곡]]을 깨끗이 정비했다. 이월의 군단이 선두에 선 것인데, 그와 그의 군단이 과거 잭슨의 휘하에서 셰넌도어 계곡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윈체스터를 지키던 밀로이 소장은 하퍼스페리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요새가 공격이나 포위전에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해서 자기 자신은 윈체스터에 잔류했었다. [[6월 14일]] 해가 질 무렵, 밀로이 소장은 [[찰스타운 (웨스트버지니아 주)|찰스타운]]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윈체스터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남군의 [[에드워드 존슨 (1816년)|에드워드 존슨]] 사단의 공격을 받아 후퇴로를 차단당했다. 대략 3,000명 이상이 포로가 되었고, 남군은 수많은 소총과 보급 마차를 탈취했다. 리는 원래 롱스트리트 군단과 힐 군단을 블루리지 산맥 동쪽에 배치할 생각이었지만, 이월의 윈체스터 전투 승리로 필요한 보급이 가능하도록 서쪽으로 이동 배치하게 되었다. 이로써 북버지니아군 전체가 셰넌도어 계곡에서 북쪽으로 계속 기동하게 되었다.
 
한편, 포토맥군은 익숙하지 않은 길로 이동하고 있었다. [[6월 16일]], 포토맥 군은 매나서스 환승역에 도착했다. 후커는 리의 의도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스튜어트 기병대가 블루리지 산맥 후방에서 북버니아군의 움직임을 감추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후커는 원래 리가 없는 동안 방어가 허술해질 [[리치먼드 (버지니아 주)|리치먼드]]를 점령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링컨은 단호하게 리의 북버지니아군이 진짜 목표라는 점을 환기시켰다. 링컨의 명령은 리를 추격하여 패배시키라는 것이었고, 구체적으로는 리와 워싱턴, 볼티모어 사이에서 대기하라는 명령했다. 워싱턴을 지키며 리치먼드가 아닌 리를 공격하라는 명령이었다.
 
; ===[[앨디 전투]] ([[6월 17일]])===
: [[저드슨 킬패트릭]]의 북군 기병여단과 [[토마스 문포드]] 대령의 남군 기병대 간에 벌어진 전투. 4시간의 산악전 끝에 킬패트릭은 증원군을 받아 문포드를 미들버그로 쫓아냈다.
 
; ===[[미들버그 전투]] ([[6월 17일]] ~ [[6월 19일]])===
: 1 [[로드아일랜드 주|로드아일랜드]] 기병대가 남군의 2개 기병여단의 기습 공격을 받고 추격당한 전투. [[6월 19일]]에 스튜어트의 본대를 미들버그에서 쫓아냈고 스튜어트 기병대는 계곡으로 멀리 철수했다.
 
; ===[[어퍼빌 전투]] ([[6월 21일]])===
: [[존 뷰퍼드]] 준장의 기병 사단이 남군 기병대 좌익을 공격한 전투다. 스튜어트는 [[애쉬비 갭]] 근처의 강력한 방어 진지로 후퇴했으나, 곧 3개 기병여단을 이끌고 계곡을 떠났다. 스튜어트는 포토맥군 우익의 뒤로 돌아 동쪽으로 향하여 장거리 정찰 및 기습을 가할 생각이었다. 이것은 전쟁 중 가장 논란이 된 사건 중 하나가 되었다. 리가 스튜어트에 내린 명령은 보병군단을 호위하고 북군의 움직임에 대해 정보를 수집하여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튜어트는 리의 명령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무시했든가 둘 중에 하나였다. 리는 적의 영역 내에서 장님이 된 채 남겨진 셈이었고, 반면에 스튜어트는 북군 주변을 맴돌며 보급부대를 기습하면서 예전의 자신의 명예를 다시 세우려고 했다. 브랜디 역 전투에서 기습을 당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도 한 요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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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는 북군이 원래 주둔지를 떠나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스튜어트 기병대가 제대로 첩보를 보고하지 않은 덕분에 리는 주변 상황에 대해 아무런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고, 롱스트리가 고용한 첩보원이 6월 28일에 북군이 포토맥 강을 건너 리의 진격로를 따라 추격해오고 있다는 보고를 해오자 그때서야 상황을 알게 되었다. 이때 3개 군단으로 나누어진 남군은 서로 너무 멀리 분산되어 있었다. 이월 군단은 [[서스퀘해나 강]]에 도착하여 펜실베이니아 주도인 [[해리스버그 (펜실베이니아 주)|해리스버그]]를 위협할 준비를 했고, 얼리 사단은 [[요크 (펜실베이니아 주)|요크]]를 점령했다. 요크는 전쟁 중 남군이 점령한 도시 중 가장 북쪽에 있는 도시였다. 롱스트리트와 힐은 [[챔버스버그 (펜실베이니아 주)|챔버스버그]] 근처에 있었다. 리는 긴급 메시지를 군단장들에게 보내 [[캐쉬타운 (펜실베이니아 주)|캐쉬타운]]이나 게티즈버그 근처로 집결하라고 명령했다.
 
;=== [[하노버 전투]] ([[6월 30일]])===
: 북군을 상대로 장러기 기습에 나선 젭 스튜어트는 북군 기병연대를 공격해 [[하노버 (펜실베이니아 주)|하노버]]의 거리를 따라 밀어붙였다. 북군의 [[엘른 파른스워스]] 준장의 여단이 도착해 반격했고, 거의 스튜어트를 붙잡을 뻔했다. 북군의 지원부대가 도착한 후, 스튜어트는 막다른 곳에 몰렸고, 동쪽으로 멀리 도망쳐야 했다. 진격하는 이월과 접촉을 유지하라는 명령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때는 리가 대규모 전투를 벌이기 이틀 전이었다.
 
;=== [[칼라일 전투]] ([[7월 1일]])===
: 이월의 군단의 위치를 파악하고자, 스튜어트는 [[칼라일 (펜실베이니아 주)|칼라일]]로 향했는데, 그곳은 며칠 전에 이월이 점령했던 곳이었다. 젭 스튜어트는 소규모 북군 민병대가 마을을 점령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그들을 몰아내기 위해 전투를 벌였다.
 
; ===[[게티즈버그 전투]] ([[7월 1일]] ~ [[7월 3일]])===
: 게티즈버그 전투는 전쟁 중 가장 큰 전투였으며, [[남북전쟁의 전환점|전환점]]으로 간주된다. 미드는 양측을 합쳐 16만여 명이 51,0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3일 간3일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게티즈버그 전투는 [[7월 1일]] 아침, [[헨리 히스]] 사단의 여단이 뷰퍼드의 기병대 및 뷰퍼드를 지원하러 달려온 [[존 레이놀즈]]의 [[북군 1 군단]]과 교전하면서 시작되었다. [[북군 11 군단]]이 도착하면서, 11군단과 1군단은 게티즈버그 북쪽에서 내려온 이월 및 힐의 군단과 싸웠고, 점차 마을로 밀려났다. 두 군단은 마을 남쪽의 [[묘지 언덕]], [[컬프스힐]], [[묘지 능선]] 등의 방어지점을 확보했다. [[7월 2일]], 리는 미드의 북군에 대해 좌우 양쪽에서 대규모 공격을 개시했다. 격렬한 전투는 [[리틀 라운드 탑]], [[게티즈버그 7월 2일 전투#악마의 소굴|악마의 소굴]], [[게티즈버그 7월 2일 전투#밀밭|밀밭]], [[게티즈버그 7월 2일 전투#복숭아 과수원|복숭아 과수원]], 동쪽 묘지 언덕과 컬스프힐에서 벌어졌다. 미드는 내선을 따라 부대를 배치했고, 남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7월 3일]], 리는 북군 중앙 진지에 대해 [[피켓의 돌격]]을 감행했으나, 3개 사단이 도륙되었다. 이때 스튜어트는 복귀하여 기병대를 이끌고 북군 후방으로 침투하려다가 주요 전장으로부터 동쪽에서 별로 전황에 영향을 주지 못한 전투를 치렀다. 두 군대는 [[7월 4일]]까지 각자의 진지에서 대치했고(이 날, [[빅스버그 전투]]가 북군의 승리로 끝났다), 리는 후퇴를 명령했다.
 
;=== [[헌터스타운 전투]] ([[7월 2일]])===
: 스튜어트가 게티즈버그에 도착한 후, [[웨이드 햄프턴 3세]]에게 남군 전선의 좌익을 엄호할 지점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햄프턴은 헌터스타운 도로를 따라 마을 북동쪽 5.8Km지점으로 갔다. 공교롭게도 북군도 기병대를 보내 리의 전선 후방으로 우회하려고 하고 있었다. [[저드슨 킬패트릭]] 사단의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와 [[엘른 파른스워스]]의 2개 기병여단이 남군 좌익 끝지점에서 침투로를 탐색하고 있었다. 커스터는 헌터스타운과 게티즈버그 사이의 도로에서 햄프턴을 공격했고, 햄프턴도 반격했다. 파른스워스 여단이 도착했을 때 햄프턴은 그의 공격을 막지 못했고, 햄프턴이 게티즈버그쪽로 후퇴할 때까지 저녁이 될때까지 포병대가 계속 포격을 퍼부었다.
 
;=== [[페어필드 전투]] ([[7월 3일]])===
: [[7월 3일]] 오후 중반 [[윌리엄 E. 존스]] "로렐 여단" 예하 소부대가 [[페어필드 (펜실베이니아 주)|페어필드]] 근처에서 북군 6기병대와 충돌한 교전이다. 6 버지니아 기병대가 격퇴당한 첫번째 전투 후, 존스는 7 버지니아 기병대와 포병대를 끌고 왔다. 증원군 덕분에 존스는 방어진지에서 북군을 몰아내고 약 3마일(약 4.8Km) 가량을 추격했다. 존스의 승리로 남군은 [[포토맥 강]]으로 후퇴로인 하게스타운 도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파일:Gettysburg Campaign Retreat.png|thumb|400px|[[7월 5일]] ~ [[7월 14일]]까지 게티즈버그 전역 상황도]]
;=== [[윌리엄스포트 전투]] ([[7월 6일]] ~ [[7월 16일]])===
: 윌리엄스포트 전투는 리가 [[포토맥 강]]으로 철수하는 동안 벌어진 소규모 교전들 중에 하나다. 미드는 리를 추격하긴 했지만 리가 포토맥 강을 건너 빠져나가기 전에 공격할 수가 없었다. 7월 4일 이후 많은 비가 내려 도로 사정이 양쪽 모두에 추격과 후퇴에 지장을 주었다. 그러나 리에겐 그런 와중에도 미드보다 먼저 서둘러야 하는 입장이었다. 부상자 수송 마차를 호위하던 남군 기병대 [[존 D. 임보덴]](John D. Imobden) 준장은 [[7월 6일]] 비 때문에 불어나 강물이 넘쳐흐르는 바람에 길이 끊겨, 총을 들 수 있는 부상자들과 함께 존 뷰퍼드와 킬 패트릭이 지휘하는 북군 기병대에 맞서 싸웠다. [[7월 12일]]에 부하들과 참모회의를 소집한 미드는 리가 강을 안전하게 건너기 전인 [[7월 14일]]에 공격할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리의 북버지니아군은 [[7월 13일]] 밤과 [[7월 14일]]에 [[폴링워터스, 웨스트버지니아|폴링워터스]]에서 강을 건넜고, 미드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히스 사단 예하 부대가 도하를 엄호했고, 북군의 킬패트릭 기병대가 후방 경계 중이던 남군 약 70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피켓의 돌격에서 살아남은 남군 [[존스턴 페티그루]] 준장이 이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 [[본스보로 전투]] ([[7월 8일]])===
: 리가 [[포토맥 강]]을 건너기 전에 [[사우스 산맥 (메릴랜드와 필라델피아)|사우스 산맥]]에서 양군 기병대 간에 벌어진 전투
 
;=== [[매너서스 갭 전투]] ([[7월 23일]])
: 미드는 [[셰넌도어 계곡]]에서 후퇴하는 리의 군대를 공격하는 데 실패했다. [[윌리엄 프렌치]] 소장의 돌격은 협동이 잘 안되었고, 남군을 몰아내기는 했으나, 남군은 비교적 큰 피해없이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다. [[7월 24일]] 북군은 [[프론트로얄 (버지니아 주)|프론트로얄]]을 점령했지만, 리의 북버지니아군은 안전하게 추격권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게티즈버그 전역은 이로써 종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