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루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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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프랑스]] [[마옌]]의 라발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앙제]]에 있는 법률사무소에서 일했다. 20세 때 지원병으로 육군에 입대하여 군악대에서 [[클라리넷]] 연주자로 근무, 안지애에 주둔한 51보병 연대음악대에서 복무했다. 이때 그가 미술에 특별한 재능을 나타내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 복무 5년째 되던 해 부친이 사망하여 제대하였고, [[파리 시|파리]]에서 모친과 함께 살며 서기로 있다가 71년 첫 번째 아내 클레망스의 연고지에서 파리시 입시세관(入市稅關) 직원이 되었다. 이 때이때 르 두아니에(Le Douanier:세관원) 루소 라는 별명 혹은 애칭을 얻게 된다. 이후 25년간 세관원 생활을 계속하다가, 49세가 되던 해에 그림만을 그리기 위해 스스로 나온다. 루소는 매달 받는 연금 50프랑만으로는 생활을 해나갈 수가 없어 [[공예]] 학교에 나가 소묘도 가르치고 그의 화실에서 아이들에게 음악과 그림을 가르치는 등 여러 가지 일에 종사했다.
 
루소는 가난했을 뿐만 아니라 가정적으로도 행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25세 때 10년 아래인 15세의 크레망스와 결혼하여 일곱 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그 중 다섯 명이 죽고 크레망스마저 1888년 34세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0여 년 동안을 부인 없이 지낸 루소는 55세 때인 1899년 미망인인 조세핀누와 재혼했는데 조세핀누 역시, 4년 후인 1903년에 사망하고 만다. 루소는 1890년에 그린 (나 자신, 초상 : 풍경)이란 작품 팔레트 뒷면에 이 두 여인의 이름을 써 넣어 먼저 간 크레망스를 추모하고, 재혼한 조세핀누의 건강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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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격적인 작품 활동의 시작 ==
 
1885년 [[루브르 미술관]]에 나가 옛 대가들의 그림을 모사하였다. 그는 미술관에 의해 모사증을 받았는데, 이를 몹시 자랑스럽게 여겼다. 85년 이후부터는 열정적으로 전시회에 참여하는데, 살롱 드 샹젤리제에 2점의 작품을 출품한 것을 시초로 1905년부터는 3년에 걸쳐 계속 살롱 도톤에 출품하였다. 1886년부터는 앙데팡당전(展)에 출품했다. 앙데팡당전에의 출품은 1899년, 1900년 두 해를 제외하고는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때그때 [[고갱]], 르동, 쇠라 등과 친교를 맺었다. 93년에는 세관을 퇴직하고 가난한 연금생활에 보탬이 되도록 아이들에게 음악과 그림을 가르치는 사숙(私塾)을 개설, 가르치면서 그림에 전념했다.
 
이듬해인 94년 앵데팡당전에 출품한 《전쟁》(파리 [[오르세미술관]])은 최초의 대표작품이 되었으며, 97년의 《잠자는 집시 여자》([[뉴욕 근대 미술관]])로 이어졌다. 루소가 그리는 주제는 파리지앵의 일상생활·초상·정물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있었지만 가장 루소적인 세계가 되는, 이국정서성, 신비적 상징성에 가득 찬 [[밀림]]을 주제로 하는 작품은 1903년의 《호랑이에게 피습당한 척후(斥候)》에서 시작되며, 1907년의 걸작 《뱀을 다루는 여자》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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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카소와의 조우 ==
 
그동안 소박하고 서툰 아마추어 화가로만 평가받았던 루소가 빛을 보게 된 계기는 1908년에 [[피카소]]에 의해 높은 평가를 받고, 다른 예술과들과 공감을 형성하면서부터이다. [[피카소]]는 그가 자주 이용하던 골동품 가게에서 루소의 《부인상》을 사 왔고, 이를 축하하기 위해 당시 신진 화가들이 모여 살던 바드라 아파트에서 '루소의 밤'을 개최하였다. 이 때이때 그의 인간됨과 예술이 찬양되었고 그의 작품세계가 인정받을 수 있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루소는 모자를 쓰고 작고 값싼 [[바이올린]]을 들고 와서, 자작곡 '구로셋'을 연주하였다고 한다. 그는 자작곡 '크레망스'(죽은 첫 부인의 이름)를 연주했다. 또한 아폴리네르가 루소를 위한 즉흥시를 지어 바쳤는데, 초대된 각계의 많은 예술가들이 루소에게 호의를 보냈다. 이는 상대방에게 호감을 주는 루소의 성격과, 예술적 순수성 및 열정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