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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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년]], [[제갈각]](諸葛恪)이 합비신성을 포위하였을 때 관구검과 함께 방어했다.
 
[[정원 (위)|정원]] 2년([[255년]]) 정월, 관구검과 함께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수춘 일대의 사람들을 협박하여 성 안으로 들어가게 하고, 성은 노약자들로 지키게 한 후, 5-~6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예주 항현으로 진격했다. 관구검은 성을 지키고, 문흠은 유격대를 맡았다.

관구검의 명령을 받아 낙가에 주둔하고 있는 연주자사 [[등애]]의 군대를 쳤으나, [[사마사]](司馬師)가 곧 등애를 구원하였다. 아들 [[문앙]](文鴦)의 진언으로 군대를 둘로 나누어 적을 협공했는데, 과연 문앙의 습격은 성공했으나 문흠이 약속한 시각에 늦어 뜻대로 되지 못하고 후퇴하였다. 한편 문흠은 거기장군 [[곽회]]에게 서신을 보내어 함께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곽회가 이 달 30일에 죽었기 때문에 헛일이 되었다.

문앙의 기습에 놀란 사마사는 눈이 튀어나와 목숨이 경각간에 처했었다. [[윤대목]](尹大目)이 사마사의 군중에서 문흠을 설득시키겠다는 이유로 문흠을 찾아, “군후는 어찌 며칠을 더 참지 못하시오!”라 하여 문흠이 사마사가 곧 죽을 것임을 깨닫기를 바랐다. 그러나 문흠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윤대목을 죽이려 하였고, 윤대목은 울면서 돌아갔다. 윤달 16일, 사마사는 기병으로 문흠을 추격하여 낙가에서 격파했다.

이 패배를 들은 관구검의 군대는 붕괴되었으며, 문흠은 오나라로 도망쳐 마침 수춘을 치러 오던 [[손준]](孫峻)에게 투항했다. 오나라에서는 문흠을 도호(都護) · 가절(加節) · 진북대장군(鎭北大將軍) · 유주목(幽州牧) · 초후(譙侯)로 삼았다.
 
===손준·손침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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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탄의 난===
이듬해([[257년]]) 6월, 당자 · 전단(全端) · [[전역 (사람)|전역]](全懌) · 왕조(王祚)와 함께 3만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제갈탄을 구원하여, [[왕기]]가 포위망을 완성하기 직전 성내에 들어가 주이와 호응하여 여러 차례 포위를 뚫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제갈탄의 부하 [[장반]](蔣班)과 [[초이]](焦彛)가 손침이 퇴각하기 전에 속히 공격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문흠은 이를 반대하였다. 제갈탄이 장반과 초이를 죽이려 하였으므로 둘은 위나라에 투항했다. 함께 구원을 온 전씨 일족들이 모조리 위나라에 투항하고, [[손침]](孫綝)도 주이를 죽이고 손은으로 주이를 대신했다가 곧 귀국했다.

이듬해([[258년]]) 1월, 문흠은 전씨 일족들이 투항했으므로, 이쪽이 크게 불리하게 되어 저쪽이 방비가 없을 때 공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제갈탄과 당자도 이를 옳게 여기고 포위망을 뚫고자 맹렬히 싸웠으나 결국 큰 피해만 입고 물러났다.

문흠은 위나라 군사를 내어 보내고 오나라 군대들로 성을 지키기를 원했으나, 제갈탄은 듣지 않았다. 안 그래도 나쁜 사이였는데 단지 어쩔 수 없이 협력하고 있던 것이 이제는 완전히 어그러져버렸다.

결국 제갈탄은 문흠을 죽였다.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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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삼국지 오나라의 인물]]
[[분류: 258년 죽음]]
[[분류:암살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