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요스 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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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스 회의''' (清洲会議,きよすかいぎ)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인 [[덴쇼 (1573년)|덴쇼]] 10년 ([[1582년]]) 음력 [[6월 27일]]에 열린 오다 가문의 후계자 문제 및 영지 재분배를 논의하기 위한 회의였다.
덴쇼 10년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가문의 당주 [[오다 노부나가]]가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으로 죽었고, 오다 가문의 적장자 [[오다 노부타다]]도 [[니조 성]]에서 미쓰히데 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하였다. 미쓰히데의 모반이 성공한 듯 보였으나, [[주고쿠 지방|주고쿠]] 공략중인 [[하시바 히데요시]]가 대군을 이끌고 회군하여 아케치 미쓰히데를 [[야마자키 전투|야마자키]]에서 토벌하였다. 이후 오다 가문의 후계와 영지 재분을 결정하기 위해 [[기요스 성]]에서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 참여한 오다 가의 가신은 [[시바타 가쓰이에]], [[니와 나가히데]], 하시바 히데요시, [[이케다 쓰네오키]]
가장 큰 쟁점은 오다 가의 후계자 문제였고, 여기서 시바타 가쓰이에는 오다 노부나가의 3남인 [[오다 노부타카]]의 옹립을 지지하였다. 하시바 히데요시 및 2명은 오다 노부나가의 적손 산보시([[오다 히데노부]])의 옹립을 지지하였다. 히데요시는 미쓰히데 토벌로 발언권이 강했으며, 시바타 가쓰이에를 제외한 2명의 지지와 3남 오다 노부타카는 간베 가문의 양자로 있었기 때문에 정통성에 있어서 적손인 오다 히데노부보다 약했다. 이 같은 이유로 오다 가문의 후계자는 오다 히데노부로 결정되었고, 히데요시는 그의 후견인으로 히데노부를 보좌하였다. 하지만, 실권을 히데요시에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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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스 회의로 인해, 그 때까지 중신의 필두로 최대 발언권을 가진 시바타 가쓰이에의 영향력이 저하되었고, 대신 하시바 히데요시가 중신의 필두로 부상등, 오다 가문내 가신들의 세력이 크게 바뀌었다. 이 대립은 후에 [[시즈가타케 전투]]로 이어졌으며, 하시바 히데요시가 천하를 쥐는 발판이 되었다.
하시바 히데요시가 산보시(오다 히데노부)를 천거한 것은 히데요시의 측근 [[구로다 요시타카]]의
[[분류:아즈치모모야마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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