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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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당일 [[이병철]] 한국비료 사장(삼성 그룹 회장)은 사카린 밀수사건과 관련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고 언론 및 학원 사업에서 손을 뗄 것을 선언하였다. 그후 이병철 사장은 헌납 교섭을 맡았던 장기영 부총리가 해임되자 개각 1주일 만인 1967년 10월 11일 한국비료 주식의 51%를 국가에 헌납했다.
 
=== 일화 ===
김두한이 거느리고 있던 폭력단은 그 규모가 3만명에 달했으므로 이에 탐을 낸 북한에서는 김두한을 육군소장에 정식으로 임명하는 임명서와 소장 계급장이 달린 북한군 장교정복을 전달했으나 김두한은 그의 부친인 김좌진 장군이 공산당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것을 알고 이 임명서와 정복을 불살라버렸다.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대북관계를 고려해 장교정복을 소각하는 것이 아닌 정중하게 반납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 출생 ===
 
김두한 가족측에서는 아버지는 [[김좌진]]이 할아버지는 [[김옥균]]의 양자라고 하였다. [[김옥균]]은 1884년에 [[갑신정변]]을 일으킨 뒤 ‘3일 천하’로 끝나고 일본으로 망명하여, 1894년 상해에서 조선 황실이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김좌진은 1894년 김옥균이 사망하고 5년이 지난 1889년에 태어났다.
 
[[김두한]] 회고록에는 [[김좌진]]이 서울 근교에서 동지들과 모임을 갖다가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도망치다가 어느 양반집 담을 넘어서 그 집 딸 '''박계숙'''(?)의 방에 숨어들었는데, 박계숙은 김좌진을 숨겨주고 하룻밤을 보내고 태어난 아이가 김두한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김좌진의 청산리 대첩은 1920년 9월의 일이고, 김좌진이 고려 공산청년회에 의해 암살 당한 것은 1930년 1월의 일로, 10년의 시간 차이가 있다. 반면에 김두한 회고록에는 청산리 전투와 김좌진 암살이암살을 3년의 시간차로 서술하고 있다.
 
===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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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 의협심과 무용담이 회자화 되었으며 1980년대 이후 [[장군의 아들]], [[야인시대]] 등 드라마와 영화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 일화 ==
김두한이 거느리고 있던 폭력단은 그 규모가 3만명에 달했으므로 이에 탐을 낸 북한에서는 김두한을 육군소장에 정식으로 임명하는 임명서와 소장 계급장이 달린 북한군 장교정복을 전달했으나 김두한은 그의 부친인 김좌진 장군이 공산당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것을 알고 이 임명서와 정복을 불살라버렸다.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대북관계를 고려해 장교정복을 소각하는 것이 아닌 정중하게 반납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 출생 ==
 
김두한 가족측에서는 아버지는 [[김좌진]]이 할아버지는 [[김옥균]]의 양자라고 하였다. [[김옥균]]은 1884년에 [[갑신정변]]을 일으킨 뒤 ‘3일 천하’로 끝나고 일본으로 망명하여, 1894년 상해에서 조선 황실이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김좌진은 1894년 김옥균이 사망하고 5년이 지난 1889년에 태어났다.
 
[[김두한]] 회고록에는 [[김좌진]]이 서울 근교에서 동지들과 모임을 갖다가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도망치다가 어느 양반집 담을 넘어서 그 집 딸 '''박계숙'''(?)의 방에 숨어들었는데, 박계숙은 김좌진을 숨겨주고 하룻밤을 보내고 태어난 아이가 김두한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김좌진의 청산리 대첩은 1920년 9월의 일이고, 김좌진이 고려 공산청년회에 의해 암살 당한 것은 1930년 1월의 일로, 10년의 시간 차이가 있다. 반면에 김두한 회고록에는 청산리 전투와 김좌진 암살이 3년의 시간차로 서술하고 있다.
 
== 가족 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