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무라 사다아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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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현]] [[고세 시]] 출신으로 PL가쿠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1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부터 3순위로 지명을 받아 입단, 높은 배팅 센스와 신체 능력을 무기로 프로 2년차인 [[1983년]]에 84경기 출전을 완수했다. 규정 타석에 채우지는 못했지만 시즌 타율 3할 2푼 6리를 기록하여 기대 이상의 성적을 남겼다. 그 활약을 계기로 다음 해인 [[1984년]]부터 [[우익수]]라는 수비 포지션을 차지했다.
 
[[1986년]]은 주축으로서 128경기에 출전하면서 타율 부문 5위와, 23개의 홈런을 기록, 이듬해인 [[1987년]] 시즌에는 타율 5위와 86타점, 30홈런을 달성했다. [[1988년]] [[3월 18일]]에는 [[도쿄 돔]]이 완공하면서 도쿄 돔에서의 첫 경기([[한신 타이거스]] 전)이자 시범 경기에서 제1호 홈런을 때려냈다. 부상 당하기 전까지의 프로 7년간의 통산 타율은 3할 2푼 1리였는데 자신보다 5살이나 많은 오른쪽의 주포인 [[하라 다쓰노리]]와 함께 각각 3번과 4번 타자로 활약했다. 그러나 [[1988년]] [[7월 6일]]에 있은 [[주니치 드래곤스]]와의 경기([[삿포로시 마루야마 구장]])에서 3회에는 개인 통산 100호 홈런을 기록했지만 8회 수비 도중 [[나카오 다카요시]]의 타구를 잡을려고 플라이를 처리하려던 순간 당시 [[중견수]]였던 [[사카에무라 다다히로]]와 충돌하는 큰 부상을 입었다. <ref>당시 1988년 [[7월 7일]]자 [[요미우리 신문]] 19면에 실린 기사에서 당초에는 ‘인대 손상’ 이라고 발표되었다. [[오 사다하루]] 감독(당시)도 이 경기에 대해 “경기에 이긴 것보다는 요시무라의 부상이 걱정이다. 부상이 일어난 것은 어쩔 수는 없지만….” 이라고 말했다.</ref> 이 경기는 그 직전의 7회말에 요시무라에게 타석이 돌아오면 요시무라에게 수비 다지기로 보낼 예정이었다고 했는데 장기간 요양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어 그래도 후유증이 확실하게 남을 정도의 매우 심각한 부상이었다. 부상 당한 직후 정말로 복귀가 이루어질지 의문시되는 일부 언론의 보도가 나오면서 당시에는 혼란한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후 홋카이도 대학 부속 병원으로 입원했지만 미국으로 도미해 재활 훈련을 받았고, 두 차례의 걸친 대수술과 1년 이상 재활 훈련을 받은 끝에 100미터를 11초대 전반에 주파할 수 있을 정도의 기적적인 회복을 보였다.
 
이듬해 [[1989년]] [[9월 2일]]에 대타로 복귀했을 당시 도쿄 돔 장내 아나운서가 요시무라 본인의 이름을 호명하는 방송이 나오는 순간 관중들의 함성이 울려퍼졌다. 이 타석에서의 상대 투수는 당시 신인이었던 [[가와사키 겐지로]]였다(결과는 내야 땅볼). [[1990년]] [[9월 8일]], 팀의 리그 우승을 결정 짓는 끝내기 홈런을 때려내면서(이 경기에서도 상대 투수였던 가와사키 였다) [[1990년대]] 전반에는 팀내 간판 외야수로서 활약했다.
 
== 출신 학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