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무라 사다아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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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
=== 선수 시대 ===
[[나라 현]] [[고세 시]] 출신으로 PL가쿠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1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부터 3순위로 지명을 받아 입단, 높은 배팅 센스와 신체 능력을 무기로 프로 2년차인 [[1983년]]에 84경기 출전을 완수했다. 규정 타석에 채우지는 못했지만 시즌 타율 3할 2푼 6리를 기록하여 기대 이상의 성적을 남겼다. 그 활약을 계기로 다음 해인 [[1984년]]부터 [[우익수]]라는 수비 포지션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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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1989년]] [[9월 2일]]에 대타로 복귀했을 당시 도쿄 돔 장내 아나운서가 요시무라 본인의 이름을 호명하는 방송이 나오는 순간 관중들의 함성이 울려퍼졌다. 이 타석에서의 상대 투수는 당시 신인이었던 [[가와사키 겐지로]]였다(결과는 내야 땅볼). [[1990년]] [[9월 8일]], 팀의 리그 우승을 결정 짓는 끝내기 홈런을 때려내면서(이 경기에서도 상대 투수였던 가와사키 였다) [[1990년대]] 전반에는 팀내 간판 외야수로서 활약했다.
 
[[1997년]] 시즌 종료 후에는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으로부터 요미우리의 주장(제16대)으로 지명되었고, [[1998년]]에는 17년 간의 현역 생활을 은퇴했다.
 
=== 은퇴 이후·지도자 시대 ===
은퇴 후 [[2002년]]부터 [[2003년]]까지 친정팀인 요미우리의 1군 타격 코치를 맡았고, 이후 야구 해설가로 활동했다. [[2006년]]에는 요미우리의 2군 감독으로 취임했다. 2006년은 시즌 후반기에 부상자가 속출한 1군에서의 [[와키야 료타]]를 1번 타자로 기용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07년]]은 [[사카모토 하야토]] 등 4명의 신인들을 우선적으로 기용했지만 팀의 출루율과 희생타의 갯수 등은 리그 최저 기록이 되었지만 재조정 중의 1군 투수 등의 도움을 받아 이스턴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2009년]]부터는 요미우리의 1군 야수 종합 코치로 취임했다.
 
== 출신 학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