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루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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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y Leo (토론 |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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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격적인 작품 활동의 시작 ==
 
1885년1880년경부터 그림을 그렸다고 추정되는데, 당시의 관학파(官學派)인 제롬, 클레망 등을 존경하였다고 한다. 1884년 [[루브르 미술관]]에 나가 옛 대가들의 그림을 모사하였다. 그는 미술관에 의해 모사증을 받았는데, 이를 몹시 자랑스럽게 여겼다. 85년 이후부터는 열정적으로 전시회에 참여하는데, 살롱 드 샹젤리제에 2점의 작품을 출품한 것을 시초로 1905년부터는 3년에 걸쳐 계속 살롱 도톤에 출품하였다. 1886년부터는 앙데팡당전(展)에 출품했다. 앙데팡당전에의 출품은 1899년, 1900년 두 해를 제외하고는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때 [[고갱]], 르동, 쇠라 등과 친교를 맺었다. 93년에는 세관을 퇴직하고 가난한 연금생활에 보탬이 되도록 아이들에게 음악과 그림을 가르치는 사숙(私塾)을 개설, 가르치면서 그림에 전념했다.
 
이듬해인 94년 앵데팡당전에 출품한 《전쟁》(파리 [[오르세미술관]])은 최초의 대표작품이 되었으며, 97년의 《잠자는 집시 여자》([[뉴욕 근대 미술관]])로 이어졌다. 루소가 그리는 주제는 파리지앵의 일상생활·초상·정물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있었지만 가장 루소적인 세계가 되는, 이국정서성, 신비적 상징성에 가득 찬 [[밀림]]을 주제로 하는 작품은 1903년의 《호랑이에게 피습당한 척후(斥候)》에서 시작되며, 1907년의 걸작 《뱀을 다루는 여자》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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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하게 된 비평가 W. 우데 등과도 알게 되었다.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1909, [[바젤 미술관]])》는 아폴리네르의 호의있는 주문에 의해 제작되었다. 아폴리네르와 그의 애인 마리 로랑생을 그린 이 그림은 아폴리네를 루소를 돕기 위해 무려 5만 프랑을 지불했다고 전한다. [[피카소]] 등의 호의는 단순히 인간미 있는 노화가(老畵家)에 대한 선의에서 뿐만뿐만이 아니라 사물을 단순화하여, 명확하고 구성적인 구도를 가진 루소의 세계에서 20세기가 필요로 하는 소박함과 [[큐비즘]]에 통하는 명확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작품은 사실과 환상을 교차시킨 독특한 것이어서 초기에는 사람들의 조소를 받았다. 1905년경부터 [[피카소]], 아폴리네르, 우데 등이 그의 작품에 주목하여 평가하기 시작하였으나, 그에 대한 실질적인 평가는 그의 사후에 이루어졌다. 루소는 발의 괴저(壞疽)로 인해 파리의 자선병원에서 죽었다.
이 아니라 사물을 단순화하여, 명확하고 구성적인 구도를 가진 루소의 세계에서 20세기가 필요로 하는 소박함과 [[큐비즘]]에 통하는 명확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작품은 사실과 환상을 교차시킨 독특한 것이어서 초기에는 사람들의 조소를 받았다. 1905년경부터 [[피카소]], 아폴리네르, 우데 등이 그의 작품에 주목하여 평가하기 시작하였으나, 그에 대한 실질적인 평가는 그의 사후에 이루어졌다. 루소는 발의 괴저(壞疽)로 인해 파리의 자선병원에서 죽었다.
 
== 다른 예술가와의 교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