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 학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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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학파의 사상은 [[1968년]] 이른바 [[68년 학생운동]]이라 일컫는 서방 세계와 [[일본]]의 대학가를 강타한 학생 운동의 지적 배경이 됐다. 이 학파의 중심 인물은 [[허버트 마르쿠제]], [[막스 호르크하이머]], [[테오도어 아도르노]], [[에리히 프롬]], [[레오 뢰벤탈]], [[프리드리히 폴로크]] 등이었다.
 
==기원==
 
===프랑크푸르트 사회 연구소===
 
{{Main|사회 연구소}}
 
"프랑크푸르트 학파"라는 용어는 단지 프랑크푸르트 [[사회 연구소]]에서 일했거나 관련이 있었던 사상가를 가리킨데서부터 출발했다. 이 용어는 어떤 특별한 사상적 위치나 기관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으며, 이런 사상가들 중 자신을 "프랑크푸르트 학파"라고 칭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연구소는 [[칼 구른베르그]]가 1923년에 [[괴테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와연계해 설립했으며, 이는 최초로 주요 독일 대학교와 연계된 마르크스주의 편향적 연구소였다.<ref name="britannica" />
 
"프랑크푸르트 학파"로 지칭되는 사상적 전통은 1930년대 이 연구소의 소장이었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사회 심리학자인[[막스 호르크하이머]]와 각별히 연관되어 있다. 호르크하이머는 [[테오도어 아도르노]](철학자, 사회학자, 음악학자), [[에리히 프롬]] (정신분석학자), [[허버트 마르쿠제]] (철학자)와 같은 이 학파의 가장 뛰어난 이론가들을 끌어모았다.<ref name="britannica" /> 하지만 이 연구소의 모든 사상가들이 항상 밀접하게 연관되거나 보완적인 연구들을 한 것은 아니기에 "학파"라는 이름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따라서 몇몇 학자들은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뢰벤탈, 폴로크로 한정하기도 한다.<ref>Held, David (1980), p. 15</ref>
 
===독일 전쟁 이전의 주변 환경===
 
독일의 내전 기간 중의 정치적 소용돌이는 이 학파의 발전 과정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사상가들은 1918년과 1919년 사이에 (마르크스가 공산당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 믿었던) 독일 등의 서유럽에서 나타난 노동자 계급의 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것과 경제적, 기술적으로 발전된 독일에서 일어난 [[나치즘]]에서 특히 큰 영향을 받았다. 많은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은 마르크스의 사상 중 어떤 부분이 이런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지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국가사회주의(나치즘)의 영향이 점차 커져감에 따라 사회 연구소의 설립자들은 연구소를 나라 밖으로 옮길 것을 준비하기로 했다.<ref>"The Origins of Critical Theory: An interview with Leo Lowenthal" by Helmut Dubiel in Telos 49</ref> 1933년 히틀러의 집권 이후, 이 연구소는 [[제네바]]로 옮겼고, 1935년에는 [[콜럼비아 대학교]]와 연계해 [[뉴욕]]으로 옮겨갔다. 이 시기부터 중요한 연구 결과가 나오기 시작해 미국과 영국 학계에서 점점 호의적인 반응을 얻어갔다.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폴로크는 1950년대 초 [[서독]]에 정착했으며, 마르쿠제와 레벤탈, 키르히하이머를 비롯한 나머지는 미국에 남았다. 이 연구소는 1953년이 되어서야 형식적으로 프랑크푸르트에 다시 설립되었다.<ref>Held, David (1980), p. 38</ref>
 
== 학파 구성원들의 특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