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언론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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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기에 김성수는 [[문맹]] 백성들을 보며 스스로 먼저 [[신학문]]을 배우고 그것에 기초해 선진사상과 선진기술을 동포에 전수시킴으로써 민족의 실력을 배양시켜서 조국의 [[민족 해방|자주독립]]을 이룩해야 한다는 신념 하에 [[도쿄|동경]][[유학]]을 결심<ref name="건국영웅"/>, 그러나 집안에서는 그의 유학을 반대하였다. [[1908년]] [[10월]] 상투를 단발하고, 상투를 자른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사죄의 편지를 부모에게 남기고 [[송진우]]와 함께 비밀리에 [[일본]](日本)으로 유학길을 떠났다. 가정 사정 때문에 [[백관수]]는 중도에 포기했지만 김성수는 [[송진우]]와 길을 떠났는데, 집안에서는 병환을 핑계로 노비를 보내 그를 불렀으나 자신을 부르려는 계획임을 알고는 급히 [[전라북도]] [[옥구군]] [[군산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송진우]](宋鎭禹)와 함께 [[일본]] 도쿄에[[도쿄]]에 도착한 김성수는 [[도쿄]] 시내에 하숙하며 [[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敎)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영어]]와 [[수학]] 등을 배웠는데, [[일본어]] 실력이 부족했던 김성수는 별도의 가정교사를 초빙하여 [[일본어]] 회화를 배웠다. [[1909년]] [[4월]] 송진우와[[송진우]]와 함께 [[긴조중등학교]](錦城中等學敎) 5학년에 편입학했다. [[1910년]] [[3월]] 긴조중등학교를[[긴조중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이어 [[4월]] 김성수는 역시 송진우와[[송진우]]와 함께 [[일본]] [[도쿄|동경]]의 [[와세다 대학교]](早稻田大學敎)에 입학하였다.<ref name="건국영웅"/> 이후 [[와세다 대학교]] 예과(豫科)에서 수학하던 중, [[8월 29일]] [[한일합방]]으로 [[대한제국]]이 강제로 병합되자 충격을 받은 [[송진우]]는 귀국하였고, 김성수는 홀로 [[일본]]에 남아 공부를 계속했다. [[1911년]] [[와세다 대학교]] 예과를 마치고, [[와세다 대학교]] 본과에 입학, [[정치경제학|정경학부]]에서 공부했다. 김성수는 집안에서 부치는 학비 등으로 어렵지 않은 생활을 하였다. [[와세다 대학]]에서 사귄 친구들은 [[설산 장덕수]], [[해공 신익희]], [[낭산 김준연]] 등이었다.
 
그러나 재학 당시 학생의재학생의 신분으로, 김성수는 불우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학생들을 찾아 지원해주었고, 대신 학비를 납부해 주기도 하였다. [[1914년]] [[와세다 대학교]] 정경학부를[[정치경제학|정경학]]부를 졸업한 뒤 그해 [[7월]] 귀국하였다.<ref name="건국영웅"/> 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승문]]에 의하면 인촌의 도움을 받은 확인된 사람만도 유학생 50여명을 포함 73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때 김성수는 일본에서 산업자본의 골간이 되는 부분들을 눈여겨 봐둔 뒤, [[기업]]·[[학교]]·[[언론]] 등을 통해 현실적인 힘을 마련하겠다<ref>박태균, 한국전쟁(책과함께, 2006) 42쪽</ref>고 다짐하였다.
 
==== 교육·계몽 활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