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문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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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고려조의 순수한 우리 [[국문학]]은 표기 수단을 얻지 못하고 구비문학으로 전래된 것이지만 그 문학사적 위치는 최고의 수준을 지니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라 말에서
이 향가의 계류는 [[고려 예종]]
이 고려가요는 몽고 침략 이후 궁중을 중심으로 보존된 것으로 문학적인 면으로 볼 때에는 아름다운 해조(諧調)를 이루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우리 노래였기 때문에 한문학자나 위정자들은 이를 무조건 폄시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참다운 국문학(國文學)이었고 그 문학적 향기는 높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를 국문학의 암흑기로 다루고 있는 분도 있으나 이는 정당한 평가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은 양이 문제가 아니라 질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이제현]]
이들 속요(俗謠)는 유명인에 의한 창작적 가요도 있지만 한편 각 지방의 군악(郡樂)이 궁중에 올라와서 궁중무악으로 승화한 것도 있어 그 형태는 다양해서 <[[한림별곡]](翰林別曲)> <[[관동별곡]](關東別曲)>(安軸作), <[[죽계별곡]](竹溪別曲)> 등 이른바 일명 '[[경기체가]](景幾體歌)'라고 불리는 것들을 제외하고는 통일된 형태는 없는 것 같다. 다만 분장(分章) 형태와 여음(餘音)이 많은 것으로 보아 민요적인 색채가 짙다. 이 여음은 '메김소리'와 '받음소리'가 가지는 형태와 흡사하고 또 이것이 다양하다는 것은 무악(舞樂)과도 응분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고려가요가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 하여 유가(儒家)에서 배척할 만큼 여기에는 아무 구김살 없이 인간 애욕의 순수성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고려인다운 회의와 도회가 <청산별곡(靑山別曲)> 등에 스며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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