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통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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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통신의 추억과 한국 전자통신시대 ==
 
1980년대 중후반 PC의 본격 대중화와 함께 PC통신이 서서히 알려지게 되었다.
80년대 후반까지도 PC는 대단한 고가품이었다. PC와 모니터를 사려면 100만원 정도는 필요했으며
하드 20매가도 30-40만원 정도는 했다. 또 프린터 저가품도 40만원대. 모뎀도 만만찮은 비용이 필요했다.
 
그래서 당시 PC 이용자들 자체가 희소한 시대였고 시대의 첨단을 리드하는 지식인 집단이라는 특성이 있었다.
PC의 문법도 어려워서 8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DOS문법이 보급될 수 있었고 이때에야 어느 정도 PC대중화시대가 열렸다.
 
많은 이들에게 PC통신하면 케텔을 연상한다. 무료로 제공되었던 케텔시대만하더라도 이용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는데
케텔이 한국통신으로 매각된다는 소문이 퍼졌고 이때가 되면 유료서비스로 전환될 거라는 우려감으로 많은 통신자들은 반대의견이 대다수였다.
'''한국사회의 첫 촛불시위가''' 당시 벌어진 것으로 많은 이들은 기억하고 있다.
아마도 91년 초반기쯤이 아닐까 싶다. 당시 한국통신으로 매각반대와 유료화 반대 운동이 펼쳐졌는데, 그 방법의 하나로 촛불시위를 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 전부터 PC통신 내부에서는 치열한 반대운동이 펼쳐졌기에 그 열기를 모아 오프라인으로 이어진 시위가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한국통신이 서비스한 하이텔시대가 한국PC통신의 대중화시대를 열었다.
당시 서비스료 1만원 정도와 전화통신료라는 부과수입을 거둘 수 있었던 한국통신은 PC통신에 많은 투자를 할 수 있었고 한국전자통신시대를 화려하게 꽃핀 셈이다.
92년 정도 되면 2400BPS 모뎀이 주류가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도 느려 하품이 나올 것 같지만 그래도 케텔시대에 비교해보면 많이 빨라진 속도였다.
92년은 한국PC통신의 대중화 원년으로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한 해로 기억할만 하다.
 
PC통신하면 많은 이들은 게시판 토론과 채팅 그리고 전자우편과 동호회활동을 떠올리곤 한다.
보통 처음 가입을 하면 여러 게시판과 함게 동호회를 방문하면서 분위기를 익히게 된다.
 
게시판 중에서는 토론의 광장인 PLAZA와 함께 토론게시판이 가장 주목받았고 취미에 따라서는 다양한 게시판이 있었지만 문학게시판이 가장 활성화된 인기 게시판이 아니었나 싶다. 백일장 등에 아마추어 작가들의 많은 글들이 오르고 있었고 주류사회에선 주목받지 못했던 환타지문학이 아마추어작가들에겐 인기 장르가 되고 있었다.
 
분위기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대부분이 동호회활동이나 채팅을 시도하게 된다.
채팅은 두가지 종류가 있었다. 전체 채팅방이 모인 채팅전용 공간의 채팅과 동호회에서 회원들만 참가할 수 있는 동호회채팅이 그것이다.
 
당시 유행했던 말이 채팅폐인이다. 채팅에 몰입하여 시간가는 줄 모르고 채팅에 빠지는 족속을 의미했는데 24시간 연속 채팅 정도는 너무도 흔한 케이스에 속하곤 했다.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참가하는 채팅은 과거 한국에서 볼 수 없었던 신문화를 창출하게 되었다.
지역 취미 대화목적 참가연령에 따라 수많은 채팅방을 자유롭게 열고 참가할 수 있었는데
한국에서 이처럼 자기가 찾고싶은 부류를 찾아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도 신선한 체험이었기에
많은 이들이 이런 채팅의 마력에 빠지곤 했다.
채팅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찾아 전자메일로 구애메세지를 전하는 이들도 많았다.
 
또 인기를 모은 게 동호회활동이다. 지역, 취미, 이념, 관심사 등에 따라 많은 동호회활동이 펼쳐졌다.
문학, 독서, 바둑(온라인 바둑이 당시 유행시작), 군사메니아, 낚시, 바통모 등이 기억에 남는다.
자유게시판에서 친목을 도모하고 전문게시판에 자기의 글을 선보이면서 리플을 통해 의견을 나누었다.
그리고 많은 동회인들이 채팅창에 모여 날밤을 새면서 재밌는 대화를 이어나가며 친목을 강화했다.
 
이렇게 온라인을 통해 친목을 다진 이들이 얼굴을 맞댈 기회가 가끔 찾아왔다.
동호회 정기모임이나 채팅을 하다가 마음이 동해 급작스럽게 모이는 번개팅이 그런 케이스다.
또 개인적 채팅이나 전자메일로 친목을 도모하다가 사적인 만남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렇게 얼굴을 모르고 활동하다가 온라인에서 얼굴을 보는 게 눈팅, 눈깔맞추기로 불리곤 했다.
이들의 친목강화속도는 놀라울 정도였다. 이미 오프라인을 통해 기본 친목이 다져져 있었고 관심사가 확실했기 때문이다.
 
하이텔과 함께 천리안이 양대 PC활동무대이다가 94년 나우누리가 출범하였고 96년 유니텔이 등장했다.
이들 신생업체는 무료서비스기간 3개월을 통해 기존 PC통신회원들을 유인하였고 주요마켓팅대상은 대학신입생을 중심으로한 20대 초반이었다.
그래서 어느 PC통신을 이용하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나이를 대충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신생업체일수록 어린 이용자들이 많았다.
 
PC통신은 한국에 많은 변화를 초래하였다.
온라인 바둑서비스를 통해 길거리 기원들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한 것도 당시의 풍속도이다.
채팅이나 토론에 빠져 집에 전화가 걸리지 않은 집들이 많았다. 모뎀을 쓰면 집통화가 통화중이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전화료 3-4대는 기본이었고 10만원을 훨씬 초과한 집에서는 부모가 모뎀에 연결된 전화선을 짜르는 집들도 많았다.
이런 집에서는 결국 학생방에 모뎀연결 전용 전화를 따로 구비한 집들도 많았다.
하루 3-4시간 이상 모뎀을 쓰면 집통화에 막대한 지장이 초래되었기 때문이다.
90년대 중반 호출을 할 수 있는 삐삐가 등장하면서 통신마니아가 급한 전화에 대응할 방안이 열린 것은 다행이랄까.
 
PC통신에서 꼭 집어봐야할 것이 한국전자통신의 개막의미와 전자토론문화이다.
다양한 전자정보시대가 열었다.
신문뉴스가 온라인 서비스되는 시대를 맞았다. 어떤 뉴스가 이용자들의 관심을 끄는지 신문사들은 참고하며 편집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증권, 금융, 환율, 금리, 물가, 기업정보, 무역, 세무, 부동산, 유통정보, 문화 레저, 날씨, 농업정보, 의약 건강 등 다양한 정보를 전자통신으로 얻을 수 있었다.
 
 
 
 
 
 
 
== ASCII 아트 및 ANSI 아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