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Alexbot (토론 | 기여)
잔글 로봇이 더함: nn:Christoph Willibald Gluck
Choboty (토론 | 기여)
잔글 로봇: 영어판의 분류를 토대로 분류:발레 작곡가 추가; 예쁘게 바꿈
5번째 줄:
그는 후원자였던 프랑스의 왕비인 마리 앙트와네트의 음악 교사로서도 유명하다. 일부에서는 글루크을 적어도 오페라에선 [[로코코]]와 [[고전주의]] 시대의 음악의 아버지로 여긴다. 글루크의 드라마적이지 못한 요소는 모두 배제한 [[오페라]] 개혁은 음악의 역사에서 큰 전환점이었다.
 
== 일생 ==
글루크의 아버지는 [[체코]] [[보헤미아]]의 여러 지방에서 귀족의 삼림관(森林官)으로 근무했던 사람으로, 따라서 그의 소년시절은 식구들과 함께 여기저기로 거처를 옮기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17세경, 아버지의 반대를 뿌리치고 집을 나와 [[프라하]]로 가서, 프라하 대학의 철학과에 적을 둠과 동시에 음악활동도 시작하였다.
 
12번째 줄:
1752년부터는 빈을 중심으로 활약하여 그 무렵부터 프랑스 [[오페라 코미크 (양식)|오페라 코미크]]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남겼다. 1761년부터는 대본작가 칼차비지(Ranieri Calzabigi)와 협력하여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알체스테 (글루크)|알체스테]](Alceste)> 등을 작곡하였으나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의 인기에 눌려 별로 호평을 받지 못하였다.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글루크의 최후 무대는 [[파리 (도시)|파리]]였다. 1772년, 프랑스 대사의 권고에 의해 프랑스 오페라를 작곡할 것을 결심하고, 1774년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가 파리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프랑스 오페라풍으로 제작한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등이 그 뒤를 이었다. 당시 파리 오페라계에는 글루크를 미는 프랑스파와 피치니의 이탈리아파 사이에 대논쟁이 일어나 두 사람은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를 작곡하여 실력을 겨루었으나 결국 글루크의 실력이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그 후 파리를 떠나 빈으로 돌아와서 은퇴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다가, 1787년 빈에서 73세의 일생을 마쳤다.
 
== 글루크의 가극개혁 ==
1769년에 빈에서 출판된 <알체스테>의 [[악보]]에는 글루크 오페라에 대한 새로운 이상이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그는 "시는 음악표현의 기초가 되며 음악은 시에 종속한다. 아리아와 레치타티보의 구분이 없어야 한다. 가수의 기교 과시나 필요 이상의 음악적 장식을 가능한 한 배제하여 단순한 기법을 쓴다. 악기는 막의 상황에 따라 알맞게 선택되어야 한다. 서곡을 극 전체의 분위기와 밀접하게 관계지어야 한다. 합창, 춤, 무대장면, 무대효과 등은 극정인 명확함을 위해 통일성을 갖게 해야 한다." 등을 강조하고 있다. 글루크는 이처럼 이탈리아 오페라, 프랑스 오페라, 독일 오페라 등이 지니는 각 양식을 융합하여, 가수에 편중하는 오페라에서 '음악을 대본에 봉사케 하는 오페라'로의 개혁을 이룩하였다.
 
== 대표 작품 ==
=== 오페라 ===
*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1762년, 개정된 파리 판본 1774년
* [[알체스테 (글루크)|알체스테]] 1767년, 개정판 1776년
*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 1779년
 
== 참고 자료 ==
* {{글로벌}}
 
{{토막글|작곡가}}
31번째 줄:
[[분류:고전시대 작곡가|글루크,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분류:오페라 작곡가|글루크,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분류:발레 작곡가]]
 
[[an:Christoph Willibald Glu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