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영 (1868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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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임시정부가 진강에서 창사, [[광저우]], 유주, 기강 등으로 이주할 때 함께 이동하였다. [[1940년]] 의정원 의원에 재선출되어 활동하였고, [[1940년]] [[9월]] [[김구]] 내각이 조각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국무위원에 재선되었다. [[1942년]] [[10월]] 다시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선출할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국무위원 겸 [[재무부|재무부장]]에 임명되어 임정의 어려운 재정문제를 해결해 나갔다.<ref name="선양회"/> [[1942년]] [[10월]] [[임시의정원]]의 제3과(재정 미 예결산) 분과 위원에 선출되어 역시 의정원 재정분야를 담당하였다. [[조소앙]] 등과 기초한 10개조의 대한민국임시헌장을 기초하기도 했다.
 
[[10월 11일]] 중경방송빌딩에서 조직된 한중문화협회 창립에 참가, 창립 발기인이 되었다. [[1944년]] [[8월 29일]]자 《독립신문》 8월 제3호에 시림산인(始林山人)이란 필명으로 칼럼 '담망국노얼'(談亡國奴孼)을 기고하였다. '담망국노얼'에서 그는 [[한일합방]]의 주역인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등을 규탄, 이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1910년]] [[8월 22일]]에 기초되고 [[8월 29일]]에 발표된 '[[한일합병조약한일 병합 조약]]' 조약문을 제시하기도 했다. [[1944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감찰위원장에 임명되었다.
 
=== 정치활동 ===
==== 광복 직후의 정치활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