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드 메디시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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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년, 그토록 바랐던 왕위계승자인 왕태자 루이(나중의 [[루이 13세]])를 낳았으며 그뒤 8년 동안 다섯 명의 왕자를 더 낳았다. 이로써 궁정 내에서 그녀의 입지력은 단번에 향상되었으며 앙리 4세가 궁정을 비웠을 경우엔 국정의 전권을 대리하기에 이르렀다. 남편의 사랑도 다시 받을 수 있게 되어 이제서야 겨우 평화로운 생활을 보내나 싶었지만, 1610년에 광신적인 가톨릭교도가 앙리 4세를 암살하고 만다(마리가 앙리 4세의 암살에 연루되었다는 후문이 있다). 남편이 죽고 곧 루이 13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아직 루이 13세가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아들의 섭정으로서 프랑스의 대내외 정치를 담당하는 중책을 짊어지게 되었다.
 
[[파일:Peter Paul Rubens 050.jpg|right|250px|루벤스 작, 마리 드 메디시스의 대관식]]
 
앙리 4세의 재상을 비롯한 앙리 3세 시절의 신료들을 멀리하고 이탈리아 출신의 콘치니를 보좌관으로 중용한 그녀는 콘치니와 그의 아내 갈리가이의 힘을 빌려 명군으로 칭송받았던 앙리 4세의 모든 정치방침을 죄다 파기하였다. 종교적으로 [[로마 가톨릭]]을 강력히 옹호하던 그녀는 한창 융화를 도모 중이던 국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간의 사이를 이간질해 싸움을 부추겼으며, 프랑스와 적대적 관계였던 [[합스부르크 가]]와 혼인정책을 취하기도 하였다. 이는 곧 점차 정치에 눈을 느끼기 시작한 아들 루이 13세와 유력한 귀족들의 불만을 가져왔다. 그들은 마리에게 [[삼부회]] 개최를 강요하는 등 정치개혁을 요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