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폐예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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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4월 7일 공직에서 유대계 예술가, 공산주의적 사상을 지닌 예술가, 원하지 않는 예술가를 강제로 몰아낼 수 있게 된 '직업 관료제를 재수립하기 위한 법률'을 도입하고, 베를린에서 절정을 이룬 '책 화형식'을 통해서 나치들은 정권을 잡은 직후 몇 달만에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다양한 문화 창작이 되돌일킬 수 없게 끝났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현대 예술과 그것의 대표자들에 대한 파괴적 공격은 문학, 영화, 연극, 건축 혹은 음악과 같은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루어졌다. 스윙이나 재즈와 같은 현대적 음악은 1938년 5월 24일에 개최된 '퇴폐음악' 전시회에서 가차없이 '음악 볼세비즘'이라고 비난을 받았다. 대부분 유대계 독일인인 한스 아이슬러, 파울 힌데미트 혹은 아르놀트 쉔베르크와 같이 국제적으로 알려진 작곡가의 음악도 비독일적인 음악으로 비난을 받았다. 이어서 1940년부터는 악명이 높은 《음악 분야에서의 유대인 사전》이 발간되었다.
현대 예술과 그것의 대표자들에 대한 공격은
 
1936년 모든 현대 예술이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 특히 회화분야에서 수백 점의 예술 작품이 미술관에서 제거되었고, '퇴폐미술' 전시회에 사용하기 위해서 압수되었거나 외국으로 팔겨갔거나, 파괴되었다. 화가, 작가, 작곡가들은 외국으로 이민을 가지 않았을 경우에 직업 금지와 전시회 금지 명령을 받았다. 1933년부터 존재했던 비 아리아적인 현대 미술작품을 구매하는 것을 금지한 명령이 강화되었다. 유대계 국민의 점진적인 권리박탈로 인해서 유대인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수 많은 미술작품이 국가의 소유로 넘어갔고, 그것이 '퇴폐적'이라고 간주되면 파괴되거나 외국으로 팔려갔다.
 
==1937년 뮌헨에서 개최된 '퇴폐예술' 전시회==
 
1937년 7월 19일 뮌헨의 호프가르텐 회랑에서 '퇴폐예술' 전시회가 열렸고, 32개의 독일 미술관에서 압수한 650점의 미술작품이 전시되었다. 그 전시회는 2백만명이 넘는 관객을 끌어들임으로써 그것과 동시에 [[독일 미술 회관(das Haus der Deutschen Kunst)]]에서 개최된 '[[위대한 독일 미술 전시회(Große Deutsche Kunstausstellung)]]'를 휠씬 능가했다. 그 전시회는 42만명의 관객만을 끌어들였을 뿐이다. 조롱을 받은 미술에 대한 관심이 공식적으로 찬양을 받았던 미술에 대한 관심보다 휠씬 컸다. 전시회는 [[요제프 괴벨스]]의 주도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조형 예술국 의장이었던 아돌프 치글러가 주도적인 책임을 맡았다. 외국으로 팔려나갔거나 파괴된 총 일만 육천 점의 작품을 압수하는 것으로부터 독일 미술품 수집에서 '정화'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전시회는 제국의 대도시를 순회하면서 열렸다. 베를린에서 전시회가 개최된 다음에 1938년 5월 7일부터 6월 18일까지 빈 예술가 회관에서 개최되었고, 8월 4일부터 25일까지 잘츠부르크 축제 공연장에서 개최되었으며, 함부르크에서는 11월 11일부터 31일까지 개최되었다.
 
'퇴폐예술' 전시회에서는 전시 작품들이 정신적으로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의 스케치와 동일하게 다루어졌고, 방문객들에게 혐오감과 답답함을 불러 일으키도록 불구자의 모습이 찍힌 사진들과 결합되어 전시되었다. 그렇게 해서 아방가르드적 현대라는 미술개념이 불합리한 방식으로 다루었고, 현대 미술을 '퇴폐적'인 것으로, 몰락의 현상으로 이해하게 만들었다. '병적이고', '유대적이며 볼세비키적인' 미술을 제시하는 것은 '종족적으로 열등한' 정치적 반대자를 박해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에 이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