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폐예술: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Augenauf (토론 | 기여)
Augenauf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26번째 줄:
 
'퇴폐예술' 전시회에서는 전시 작품들이 정신적으로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의 스케치와 동일하게 다루어졌고, 방문객들에게 혐오감과 답답함을 불러 일으키도록 불구자의 모습이 찍힌 사진들과 결합되어 전시되었다. 그렇게 해서 아방가르드적 현대라는 미술개념이 불합리한 방식으로 다루었고, 현대 미술을 '퇴폐적'인 것으로, 몰락의 현상으로 이해하게 만들었다. '병적이고', '유대적이며 볼세비키적인' 미술을 제시하는 것은 '종족적으로 열등한' 정치적 반대자를 박해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에 이용되었다.
 
==예술가들의 권리박탈==
권력을 잡은 직후 나치들은 정치적으로 강요해서 전시회를 폐쇄하고 예술가들과 문화 협회에 대한 언어적 혹은 신체적 공격을 가함으로써 이후 문학 정책과 관련해서 그들이 관철하고자 생각하고 있는 노선을 미리 보여주었다. 그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수 많은 예술가들이 나치들이 권력을 잡은 직후에 독일과 인접한 국가로 도망을 쳤다. 계속된 탈출의 물결이 1935년 뉘른베르크 법률과 1938년 11월의 유대인 습격에 의해서 발생되었다. 예를 들면 64명의 함부르크 예술가들이 23개의 다른 나라도 망명을 했다.
 
==공공 수집품에서 미술품을 압수함==
1937년 7월 24일 히틀러는 모든 미술관과 공공 전시회는 '문화몰락'의 표현과도 같은 예술작품들을 내놓아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1937년 제국 조형 예술국은 함부르크 쿤스트할레에서 72점의 회화, 296점의 수채화, 파스텔화, 소묘화, 926점의 동판화, 목판화, 석판화, 8점의 조각을 압수했다. 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진 압수품 중에서 몇몇 작품은 '퇴폐예술 전시회'에 보내졌다. 1937년 8월 이후부터 이루어진 계속적인 압수를 통해서 100개 이상의 미술관에서 약 1400명의 작가들의 작품 약 2만점이 제거되었다.
 
=='퇴폐예술'에 대한 평가==
 
압수된 작품들은 베를린 보관소로 모아졌다. 미술관에서의 몰수는 1938년 5월 31일에 제정된 '퇴폐예술품 압수에 관한 법률'에 의해서 소급해서 합법화되었다. 괴링은 개별 작품들을 팔았고, 히틀러는 몇몇 작품을 '고대 거장의 작품'과 교환했고,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에 있던 중앙 소방서 마당에서 1939년 3월 20일 공식적인 공고에 의하면 1004점의 회화와 3825점의 그래픽이 소각되었으며, 많은 작품들이 감추어졌다. 125점의 작품이 1939년 6월 30일 루처른에서 경매되었다. 몰수된 작품의 판매는 제국의 위탁을 받아서 대부분 베른하르트 뵈머, 카를 부흐홀츠, 힐데브란트 쿠르리트와 페르디난트 묄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괴벨스가 1939년 7월 4일 히틀러에게 한 최종보고서에 의하면 대부분의 예술작품이 파괴되었거나 창고에 보관되었으며, 300점의 회화와 조각품 그리고 3000점의 그래픽이 외국으로 팔려나갔다고 한다."<ref>Gabriele Franke: Fabeltier oder "Judengeschoepf". Chronik einer Recherche. Hamburg 1990. S. 107</ref>
 
 
==영향==
===미술관이 겪은 궁극적 손실===
많은 독일의 미술관은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 동안 구입이나 기증을 통해서 현대 미술의 중요한 수집품을 모았다. 1937년 여름 '퇴폐예술'이라는 선동 행위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 압수를 통해서 박물관은 재고의 상당 부분을 보상없이 빼았겼다. 함부르크 쿤스트할레의 전직 관장이었던 알프레드 헨첸은 대규모 예술적, 물질적 손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한탄을 했다. "수집품의 확대는 아주 천천히 이루어진다. 미술시장 가격이 우리가 지닌 불충분한 수단으로부터 멀리 벗어날수록, 그 만큼 더 느리게 이루어진다. 여러 개의 심각한 틈새가 더 이상 메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두려워해야할 지경이 되었다. (......) 이런 부족과 틈새에 대해서 모든 독일 미술관이 할 수 있는 설명을 동일할 것이다. 쿠스타프 파울리가 1914년부터 1933년까지 신중하게 고려해서 확대시킨 현대 미술품 수집의 근간이 1937년 압수와 판매 행위로 인해서 파괴되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에 선별적으로 수집한 작품 중에서 오직 5점만이 다시 모습을 드러낼 정도의 규모로 파괴가 이루어졌다. 파울리가 젊은 동시대의 작가들이 제작한 작품 중에서 구입했던 모든 작품들, 다시 말해 뭉크, 놀데, 키리히너, 슈미트 로트루트, 헤켈, 코코슈카, 프란츠 마르크의 주요 작품과 피카소가 청색 시대 초기에 그린 작품이 그림 파괴 행위에 희생되었고, 오늘날에는 외국의 박물관이나 개인 소장품에 포함되어 있다. 그 같은 손실은 결코 다시는 온전하게 보충될 수 없다."
 
===잊혀진 미술===
퇴폐적이라고 비난을 받은 화가들 중 상당수가 오늘날에는 '잊혀진 미술가'들에 속하게 되었다. 그들은 가난 속에서 죽었거나, 자살로 내몰렸거나 살해되었고, 그들의 작품은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압수되어서 대부분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비록 계속적으로 자신들의 양식을 발전시켰지만, 새로운 예술 경향과 동일시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에 다시 인정을 받는 일에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얀켈 아들러, 발터 그라마테, 리하르트 하이츠만, 프리츠 아인스하이머, 카시아 폰 차두르스카, 아니타 레 등이 '잊혀진 미술가'에 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