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2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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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진전되지않다가 1907년즈음 가서야 겨우 진전되어갔었다. 또한 러시아에는 연평균 7%의 산업 성장화를 보이면서 한때 로마노프 왕조의 위세를 떨치기도 했으나, 노동자와 농민층이 황제에 대한 불만세력이 여전하다고 여긴 니콜라이 2세는 이러한 국내의 불만을 진정시키기 위해 [[제1차 세계대전]] 때 총동원령을 내려 많은 병력을 파병했다. 처음에 민중들은 애국심에 불타서 1차세계대전에 지지를 하였고,무려 1천 500만명이 전선에 나가 지원했었다.
 
하지만, 지휘관들의 무능함이 여실히 드러난 [[타넨베르크 전투 (1914년)|탄넨베르크 전투]]에서 자멸적인 대패를 했을뿐만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군에 지원한것 때문에 러시아의 노동력은 급격히 저하되어,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국내의 불안은 고조되어가면서 제정 러시아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각지에서 파업과 시위가 발생하고, 니콜라이 2세 황제는 [[1915년]]부터 직접 최전선 전투지휘에 나서며 국정은 황후에 맡기고, 황후를 등에 업은 라스푸틴을 중심으로 자연히 되어가면서 국정도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특히 라스푸틴의 폭정과 착취는 전대미문의 엄청난 규모에 달했다. 예를들어 민중들 사이에서는 검열되지않은 책같은것이 출판되어 라스푸틴과 황후, 공주들이 불건전한 관계를 맺고있다는등맺고있다는 등 내용의 소문이 파다했을정도였다. 결국 황제와 친했던 관리들마저 라스푸틴의 악행에 치를 떤 나머지 사퇴하여 혁명파에 붙은 자도 있었다. 이후 1916년 12월, 니콜라이 2세와 친척측근인 [[펠릭스 유스포프]] 공작을 비롯한 관리들이 라스푸틴을 죽이려고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하지만 라스푸틴은 극약을 먹고도 2시간 동안 춤을 추는 등 초인적인 체력을 보여주다가 총에 맞고도 죽지 않았다. 그 후 라스푸틴의 변사체가 발견되었는데 사망 원인은 독극물도, 총살도 아닌 익사였다.
혁명의 기운은 날이 갈수록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