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방어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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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1=[[조선]]
|교전국2=[[일본]]
|지휘관1=[[박진]](양산, 밀양) <br> [[서예원]](김해) <br> [[박의장]](경주) <br> [[신길원]]†(문경) <br> [[신립]]†(충주) <br> [[이일]](상주) <br> [[조경 (
|지휘관2=[[가토 기요마사]] <br> [[고니시 유키나가]] <br> [[구로다 나가마사]]
|병력1=군민 300명(밀양) <br> 병력 1000명(김해) <br> 병력 8000명(충주) <br> 병력 800명(상주) <br> 병력 900명(추풍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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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및 충청도 함락'''은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 전투|부산진]]과 [[동래성 전투|동래성]]을 무너뜨린 일본군이 사기가 떨어진 [[경상도]]와 [[충청도]] 지역의 관군들을 무찌르고 개전 10일 만에 [[경상도]]를, 개전 14일 만에 [[충청도]]를 함락시킨 전투이다.
== 양산
[[1592년]] [[음력 4월 17일]] [[양산]] 목사 [[박진]]은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겁을 먹어 전투다운 전투도 못하고 [[밀양]]으로 후퇴하고 [[양산]]은 왜 육군 3부대 [[구로다 나가마사]]에게 함락된다.
== 밀양 전투 ==
[[1592년]] [[음력 4월 18일]]
협곡을 건너오는 왜 육군 1부대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을 막으려 했으나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 [[마쓰라 시게노부]]의 기습 공격으로 괴멸당했고 결국 == 언양
[[1592년]] [[음력 4월 19일]] 사기가 떨어진 [[언양]] 역시 왜 육군 2부대 [[가토 기요마사]]에게 허무하게 함락되고만다.
== 김해 전투 ==
[[1592년]] [[음력 4월 20일]] [[김해]] 부사 [[서예원]]은 관군 1000명을 이끌고
[[양산]]을 함락시킨 [[구로다 나가마사]]가 김해로 쳐들어오고 초기에는 관군은 열심히 싸웠으나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고 밀양에서 지원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으로 이유겸은 도망치고 서예원은 역시 결국 도망치고 만다.
== 경주 전투 ==▼
[[1592년]] [[음력 4월 21일]] [[가토 기요마사]]는 [[경주시|경주]]로 진격하고 [[경주시|경주]] 목사 [[박의장]]이 싸웠으나 결국 함락되고 일본군은 [[경주시|경주]]에 입성해 [[불국사]]와 [[분황사]] 같은 문화재들을 닥치는 대로 불을 질러 [[경주시|경주]]의 문화재가 크게 훼손됨.▼
이에 남은 군민들이 일어나 동문에는 [[김득기]], 서문에는 [[류식]], 남문은 [[송빈]], 북문은 [[이대형]]이 맡아 다시 전투를 치렀으나 결국 김해는 무너지고 만다.
== 창원, 영천 전투 ==▼
▲[[1592년]] [[음력 4월 21일]] [[가토 기요마사]]는 [[경주시|경주]]로 진격하고
[[1592년]] [[음력 4월 21일]]과 [[음력 4월 22일]] [[가토 기요마사]]는 [[창원]]과 [[영천]]을 쉽게 함락시킨다.
== 문경 전투 ==
[[1592년]] [[음력 4월 26일]] [[상주 전투]]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는 [[문경]]으로 진격했는데 문경은 성 안이 비어있었다. 문경 관아를 지나는 도중 [[문경]] 현감 [[신길원]]이 2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화살을 쏘며, 기습 공격을 했으나 전투 끝에 [[신길원]]은 투항을 거부하다가 참수당하고 [[문경]]은 돌파당한다.
== 성주
[[1592년]] [[음력 4월 27일]] [[고니시 유키나가]]는 [[문경]]을 함락시킨 여세를 모아 [[성주]]까지 함락시킨다.
== 추풍령 전투 ==
[[1592년]] [[음력 4월 28일]] [[추풍령]]에서는 전쟁 개전 2일 만에 경상우도 방어사로 임명된 [[조경 (
특히 일본군이 밀려들자 == 결과 및 영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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