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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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2={{국기그림|일본 제국}} '''[[하세가와 기요시]]'''<br />
{{국기그림|일본 제국}} [[야나가와 헤이스케]]<br />{{국기그림|일본 제국}} [[마쓰이 이와네]]
|병력1= 75개의 사단과 9개 여단, 60여만명<br> 60만 명 <br> 항공기 200대 <br> 탱크 16대
|병력2= 8개의 사단과 6개 여단, 30여만명<br> 30만 명 <br> 항공기 500대 <br> 탱크 300대 <br> 해군 상륙함 130대
|사상자1= 약 25만여명10만 ~ 20만 명 추산
|사상자2= 약 7만여명7만 명 추산
}}
'''상하이 전투''' 또는 ''' 제2차 상하이사변'''은 [[중일 전쟁]] 발발했을 당시 [[1937년]] [[8월]], [[일본 제국]]이 [[상하이]]를 상륙하여 전투했던 전쟁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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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초기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승리를 이어갔다. 7월이 끝나갈 무렵에는 [[베이징]]과 [[톈진]]을 손쉽게 장악했고, 곧이어 8월에 중국 최대 도시인 [[상하이]]에 상륙작전을 개시하여 공격을 감행한다.
 
개전 초기때만해도 일본군 수뇌부들은 '''중국대륙 본토를 3개월이내에 완전히 장악하겠다.'''고 호언장담했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중국군의 저항이 상당히 격렬했다. 상하이에 국민당 군대는 기존의 군벌들 주축으로 이루어진 부패한 '당나라군대'가 아닌 [[장제스]]의 최정예 직속부대들이 주축이었다.
 
중국군의 상당한 저항에 놀란 일본군은 상하이 공략에 상당한 고전을 겪게되는데, 특히 '오송 상륙 전투'에서 일본군의 피해가 컸었다. 이는 1930년대에 중국내 독일 군사고문으로 파견된 젝트 장군이 중화민국 국민당군 육성을 위해 강력한 벙커밭을 조성해놓는데 추진하였고, 장개석의 직속군대 역시 독일식 장비를 갖추고 훈련을 하여 육성하였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1930년대 중화민국으로 파견한 독일 군사고문의 조언과 심혈로 설치한 벙커밭을 뚫기위해 무작정 돌진하였는데, 이과정에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또한 독일식으로 훈련받은 장개석의 직속군대의 정예 제88사단이 일본군의 지원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일본군 상륙부대를 상하이에 묶어놓아, 매우 격렬하게 저항했었다.
 
그렇게 3개월동안 격렬한 전투속에 11월, 일본군은 어렵게 상하이를 장악하여 점령하게되고, 당시 일본군들은 중국군에 대해 상당한 굴욕감과 분노감을 맛보게되면서 일본군 병사들은 악이 받쳐있을대로 적개심에 받쳐있었고, 곧바로 중국 국민당의 수도 [[난징]]을 향해 진격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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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상하이의 역사]]
[[분류:중일 전쟁]]
[[분류:중화민국의 전투]]
[[분류:일본의 전투]]
 
[[da:Slaget om Shanghai (1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