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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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원전 60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그리고 [[크라수스]]가 [[제1차 삼두정치]] 협약을 하게 되자 공화국 체제를 고수하는 키케로는 이들 실권자로부터 따돌림을 받는다. 더군다나 키케로에게 개인적으로 유감이 있는 [[클로디우스]]는 이 기회를 틈타 키케로가 집정관 재직시 [[카틸리나]]의 모반 가담자 5명을 불법으로 처형한 사실을 들추어내어 고소를 함으로써 키케로를 약 1년 6개월 동안 ([[기원전 58년]] 3월 - [[기원전 57년|57년]] 8월) 로마에서 추방시킨다. 귀향 허가를 받아 로마로 돌아와 정계에 거리를 두면서 주로 저작활동을 한다. 이 시기([[기원전 55년]] - [[기원전 51년|51년]])에 키케로는《[[웅변가에 관하여]]》(''De Oratore''), 《[[키케로의 국가론]]》(''De re publica''), 《[[법론]]》(''De legibus'')등을 썼다.
 
[[기원전 49년]] 폼페이우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 사이에 벌어진 [[카이사르 내전|로마 공화정의 내전]]에서 키케로는 어느 편에 가담할 것인가 갈등 끝에 결국 원로원파인 폼페이우스 진영에 가담한다. [[기원전 48년]] [[8월 9일]]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에게 패배함으로써 내전이 끝나자 키케로의 운명은 카이사르의 말 한마디에 달리게 된다. 카이사르는 [[로마]]로 입성한 후 키케로를 사면해 주면서 심지어 로마를 위해 계속 정치 활동을 해 줄 것을 권고한다. 그러나 점점 눈에 드러나 보이는 일인 독재 정치에 무력감과 회의를 느끼면서 주로 철학을 주제로 한 책을 쓰는 데 시간을 보낸다. 정치적 불만과 함께 [[기원전 45년]]에는 사랑하던 딸 툴리아가 사망하므로서 키케로는 삶의 보람을 거의 상실하게 된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키케로는 공화정을 되살리고자 하는 작은 희망으로 특히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탄핵하는 [[필리피카이]]를 발표하여 일인 독재와 폭력 정치를 규탄한다.
 
카이사르는 [[로마]]로 입성한 후 키케로를 사면해 주면서 심지어 로마를 위해 계속 정치 활동을 해 줄 것을 권고한다. 그러나 점점 눈에 드러나 보이는 일인 독재 정치에 무력감과 회의를 느끼면서 주로 철학을 주제로 한 책을 쓰는 데 시간을 보낸다.
[[기원전 43년]] 안토니우스를 배척하기 위한 수단으로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양자이자 법적 상속자인 젊은 [[옥타비아누스]]를 과소 평가하여 정치적으로 기만하지만, 곧 [[제2차 삼두정치]]에서 자신의 노력이 헛되었음을 실감한다. [[기원전 43년]] [[12월 7일]] 모든 희망을 버리고 로마를 피신하던 키케로는 [[제2차 삼두정치]]에 의해 살생부 명단에 올라가게 되고, 그 뒤 안토니우스의 사주를 받은 부하에 의해 카이에타 (Caieta)에서 암살 당하므로서 생을 마무리 짓는다.
 
정치적 불만과 함께 [[기원전 45년]]에는 사랑하던 딸 툴리아가 사망하므로서 키케로는 삶의 보람을 거의 상실하게 된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키케로는 공화정을 되살리고자 하는 작은 희망으로 특히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탄핵하는 [[필리피카이]]를 발표하여 일인 독재와 폭력 정치를 규탄한다.
 
[[기원전 43년]] 안토니우스를 배척하기 위한 수단으로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양자이자 법적 상속자인 젊은 [[옥타비아누스]]를 과소 평가하여 정치적으로 기만하지만, 곧 [[제2차 삼두정치]]에서 자신의 노력이 헛되었음을 실감한다. [[기원전 43년]] [[12월 7일]] 모든 희망을 버리고 로마를 피신하던 키케로는 [[제2차 삼두정치]]에 의해 살생부 명단에 올라가게 되고, 그 뒤 안토니우스의 사주를 받은 부하에 의해 카이에타 (Caieta)에서 암살 당하므로서 생을 마무리 짓는다.
 
[[기원전 43년]] [[12월 7일]] 모든 희망을 버리고 로마를 피신하던 키케로는 [[제2차 삼두정치]]에 의해 살생부 명단에 올라가게 되고, 그 뒤 안토니우스의 사주를 받은 부하에 의해 카이에타(Caieta)에게 암살당한다.
 
== 카이사르와의 친분 ==
철저한 공화주의자인 키케로와 공화정에 반발을 가지고 있는 카이사르와는 정치적으로 반대의 입장이었으나 편지를 주고 받을 정도로 상당한 친분이 있던것으로 알려져 있다.
 
망명지에서 돌아온 키케로는 카이사르에게 친구와 친지들을 소개하는 편지를 보내어 그들을 갈리아에서 기용을 부탁하는 편지를 자주 쓰곤 했고 카이사르는 기꺼이 응했다.
 
동생인 퀀티우스가[[퀀티우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자,동생을 부탁했고 퀸티우스 키케로는 카이사르 휘하의 군단장으로 종사하며 갈리아에서 전공을 세웠다.
다음은 카이사르의 내전에서의 관용을 칭찬한 키케로의 편지에 대한 카이사르의 답장이다."카이사르가 키케로에게..나를 잘 이해해주는 당신이 하는 말이니까, 내 행동에선 어떤 의미의 잔인성도 찾아볼 수 없다는 당신
 
의 말은 믿어야 할거요.그렇게 행동한것 자체로 나는 이미 만족하고 있지만 당신까지 그리 찬성해주니 만족을 넘어 기쁘기 한량없소.내가 석방한 사람들이 다시 나한테 칼을 들이댄다해도,나는 그런 일로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는 않소.내가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내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거요.따라서 남들도 자기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오."
다음은 카이사르의 내전에서의 관용을 칭찬한 키케로의 편지에 대한 카이사르의 답장이다."카이사르가 키케로에게..나를 잘 이해해주는 당신이 하는 말이니까, 내 행동에선 어떤 의미의 잔인성도 찾아볼 수 없다는 당신
 
{{인용문2|카이사르가 키케로에게..나를 잘 이해해주는 당신이 하는 말이니까, 내 행동에선 어떤 의미의 잔인성도 찾아볼 수 없다는 당신 의 말은 믿어야 할거요.그렇게 행동한것 자체로 나는 이미 만족하고 있지만 당신까지 그리 찬성해주니 만족을 넘어 기쁘기 한량없소.내가 석방한 사람들이 다시 나한테 칼을 들이댄다해도,나는 그런 일로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는 않소.내가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내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거요.따라서 남들도 자기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오."}}
 
== 키케로와 고전 라틴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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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로마 공화정]]
[[분류:고대 로마의 정치인]]
[[분류:암살된 사람]]
 
{{Link FA|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