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3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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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미카일은 [[840년]] 황제 [[테오필루스]]와 [[테오도라 (9세기)|테오도라]]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자 마자 아버지에 의해 공동황제로 지명되었고 [[842년]]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 테오도라와 함께 두살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는데 어머니의 섭정을 받았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섭정을 받을 때는 테오도라와 환관 [[테옥티스투스]]의 영향력하에 있었다. 그가 아직 어린 아이였을 때 어머니는 테옥티스투스와 함께 [[성상파괴운동|제2차 성상 파괴]]를 끝내고 성상숭배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은 [[크레타]]와 [[시리아]] 북부에서 [[압바스 왕조]]에 밀렸고 [[파울리키아파]]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로 동쪽 변방에 대한 방위가 어려워졌다.
 
미카일은 [[유도키아 잉게리나]]라는 여자와 사랑에 빠졌는데 어머니는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그녀를 맘에 들지 않이 했고 미카일과 그녀를 강제로 헤어지게 하고 유도키아 데카폴리타나라는 처녀와 결혼시켰다. 그러나 미카일은 평생 잉게리나를 곁에 두고 관계를 가졌다.
 
미카일이 장성 함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테오도라는 권력을 놓지 않았고 아들과 갈등을 빚었다. 미카일은 테옥티스투스와 사이가 벌어진 삼촌 [[바르다스]]와 손을 잡고 [[855년]] 테옥티스투스를 죽이고 이듬해에는 어머니를 쫓아내고 친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제국의 통치는 사살상 삼촌 바르다스의 손에 넘어갔다.

바르다스가 실권을 잡은 이후에 제국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아랍군을 몰아내는 승리를 거두었고 [[859년]]에는 황제가 직접 원정군을 지휘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860년]] [[루스족]]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공하여 원정을 거두고 돌아와야 했다.
 
[[파일:Michael iii.jpg|thumb|150px|left|미카일 3세]]
 
삼촌 바르다스의 영향력은 더욱 크게 되어 바르다스는 완고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이그나티우스를 물러나게하고 후임으로 박식한 [[포티우스]]를 임명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로마 [[교황 니콜라오 1세]]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와의 사이가 벌어졌다. [[키릴루스]]와 [[메토디우스]] 형제가 [[모라바]]의 [[불가르족]]과 [[슬라브족]]에 대한 선교를 시작한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이 무렵 바르다스는 사실상의 황제의 권력을 행사했는데 바르다스는 유능하게 제국을 관리했고 미카일의 제위 말기에는 항상 술에 취해 있었으므로 다음 제위는 바르다스에게 돌아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황제의 측근 중에 [[아르메니아]] 출신의 농부인 [[바실리우스 1세|바실리우스]]라는 인물이 황제의 총애를 받았고 그는 황궁에 들어와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시종장이 되었고 황제에 대한 영향력이 커졌다.
 
그러나 황제의 측근 중에 [[아르메니아]] 출신의 농부인 [[바실리우스 1세|바실리우스]]라는 인물이 황제의 총애를 받았고 그는 황궁에 들어와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시종장이 되었고 황제에 대한 영향력이 커졌다. 미카일은 첫사랑인 유도키아 잉게리나를 바실리우스와 결혼하게 하여 그녀를 황궁으로 끌어들였다. (이 때 미카일은 잉게리나와 계속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이며 잉게리나가 [[866년]] [[9월 19일]]에 낳은 아들 [[레오 6세|레오]]는 사실 바실리우스의 아들이 아니라 미카일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바실리우스는 점점 그 야망을 펼쳐 막강한 바르다스를 몰아내고 연약한 미카일을 대신해 황제가 되려는 음모를 꾸몄다.
 
바실리우스는 점점 그 야망을 펼쳐 막강한 바르다스를 몰아내고 연약한 미카일을 대신해 황제가 되려는 음모를 꾸몄다.
 
[[866년]] 미카일은 아직까지 수복하지 못한 크레타 섬에 대한 원정을 벌였는데 [[밀레투스]] 부근에서 바실리우스에게 암살당했다.
 
이 때 미카일이 암살에 관여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후속 사태를 보면 아마도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일 이후에 바실리우스에 대한 미카일의 총애는 더욱 커져 그를 공동황제로 임명했다. 그러나 미카일은 술독에 빠져 살았고 항상 전차경주만 생각했고 공동황제인 바실리우스의 간섭을 싫어하게 되었다.
그러나 황제의 측근 중에 [[아르메니아]] 출신의 농부인 [[바실리우스 1세|바실리우스]]라는 인물이 황제의 총애를 받았고 그는 황궁에 들어와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시종장이 되었고 황제에 대한 영향력이 커졌다. 미카일은 첫사랑인 유도키아 잉게리나를 바실리우스와 결혼하게 하여 그녀를 황궁으로 끌어들였다. (이 때 미카일은 잉게리나와 계속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이며 잉게리나가 [[866년]] [[9월 19일]]에 낳은 아들 [[레오 6세|레오]]는 사실 바실리우스의 아들이 아니라 미카일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바실리우스는 점점 그 야망을 펼쳐 막강한 바르다스를 몰아내고 연약한 미카일을 대신해 황제가 되려는 음모를 꾸몄다.
 
[[866년]] 미카일은 아직까지 수복하지 못한 크레타 섬에 대한 원정을 벌였는데 [[밀레투스]]부근에서 바실리우스가 바르다스를 암살했다.이 때 미카일이 암살에 관여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후속 사태를 보면 아마도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일 이후에 바실리우스에 대한 미카일의 총애는 더욱 커져 그를 공동황제로 임명했다. 그러나 미카일은 술독에 빠져 살았고 항상 전차경주만 생각했고 공동황제인 바실리우스의 간섭을 싫어하게 되었다. 결국 바실리우스는 바르다스를 죽일 때처럼 음모를 꾸몄고 [[687년]] [[9월 24일]] 잠자고 있는 미카일을 침실에서 암살했고 스스로 단독 황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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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867년 죽음]]
[[분류:비잔티움의 황제]]
[[분류:암살된 사람]]
 
[[an:Miguel I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