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웅우 왕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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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다버인과 아유타야 전쟁==
강력한 법을 통해 점령지를 통합하려 했던 바인나웅의 정책은 그 자신의 군사적 수완에 의해 그나마 유지되고 있을 뿐이었기 때문에, 바인나웅 사후 정복지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발생하였다. 뒤를 이은 '''[[난다버인]]'''(재위 1581~1599)은 선왕의 명으로 [[라카인]] 공격에 나섰던 군대를 불러들여 일단 이를 진정시키고 난다버인의 삼촌이 영주로 있으면서 왕위 찬탈을 노리던 잉와 지역을 안정시켰으나, 이후에도 잉와 지역의 반란은 멈추지 않았다. 이때 잉와 정벌에 동참한 아유타야의 나렛 왕자는 아유타야의 독립을 쟁취할 속셈으로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난다버인의 군대를 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를 알아차린 난다버인은 고의로 패배한 것처럼 소문을 퍼뜨렸고, 이에 나렛 왕자는 버고 지역으로 들어갔으나 곧 난다버인의 추격이 있자 이를 따돌리고 아유타야로 돌아갔다.
 
아유타야가 이렇게 반기를 들자 난다버인은 1584년 대규모 아유타야 공격을 감행했다. 초기에는 따웅우군이 밀고 들어왔으나, 나렛 왕자는 [[치앙마이]]와 [[아유타야]]를 비우고 퇴각하는 [[청야 전술]]을 사용하여 전세를 역전시켰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버마에 우호적이었던 속국 [[캄보디아]]의 후방 공격으로 인해 아유타야군이 퇴각하는 따웅우군을 국경 밖으로 추격하지는 못하였다. 이후 1585년과 1586년 난다버인은 아유타야에 다시 전쟁을 걸었으나, 두 번 모두 패배하였다. 연이은 전쟁 패배로 버마의 민심은 흉흉해졌으나, 난다버인은 반대자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며 또 한 번의 아유타야 공격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1590년의 4차 침공과 1592년의 5차 침공에서도 왕위에 오른 나렛 왕자, [[나레수안 대왕]]의 수완에 말려 연이어 대패하였다. 오히려 나레수안 왕은 캄보디아를 공격해 복속시켰고, 하부 버마를 공격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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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웅얀의 즉위와 냐웅얀 왕조==
아유타야 전쟁의 영향으로 국력을 엄청나게 소진한 버마 지역에서는 여러 군벌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포르투갈]]인 [[드 브리투]](De Brito, 버마식으로 응아진까)가 하부 버마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삐, 따웅우, 잉와 등이 각각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여 버고 중심의 정통 정권에 맞섰다. 난다버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난다버인의 동생 '''[[냐웅얀 (왕)|냐웅얀]]'''(재위 1599~1605)은 [[냐웅얀]] 지역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확장하여 잉와를 접수하였고, 이후 버고와 삐의 잔존세력을 흡수하여 잉와에서 대관식을 올렸다. 이후 냐웅얀은 다시 버마의 통일을 위해 정복전쟁을 벌였으나 병에 걸려 얼마 못 가 숨졌다. 이 냐웅얀의 혈통을 중심으로 하는 따웅우 왕조를 '''냐웅얀 왕조'''라고도 하는데, 이후 따웅우 지역이 독립적인 역할을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또 폐허가 된 버고 역시 정치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왕국의 정치적 중심은 잉와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아나욱펫룬과 포르투갈인의 정치적 소멸==
냐웅얀의 아들 '''[[아나욱펫룬]]'''(재위 1605~1628)은 다시 통일 전쟁을 벌여 1610년까지 삐와 따웅우를 재편입하고 드 브리투의 세력을 공격하여 평정하였다. 나아가 포르투갈계 잔여 세력을 라카인의 왕이 섬멸하여, 버마에 세력권을 구축하려던 포르투갈의 시도는 완전히 좌절되었다. 이후 아나욱펫룬은 치앙마이를 재복속하여 조금 더 세력을 확장하고, 버고에 왕성을 다시 지어 버고를 부흥시키려 노력하였으나, 아들 민예데익바와의 치정 사건에 휘발려 살해되었다.
 
==따룬의 안정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