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학 (1891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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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학'''(崔昌學, <small>일본식 이름: </small>松山昌學, [[1890년]] ~ ?)은 [[일제 강점기]]의 광공업 분야 기업인이다. [[일제 강점기]]에 금광을 개발하여 부를 축척했고, 광복 뒤에는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자신의 별장인 [[경교장|죽첨장]]([[경교장]])을 제공하기도 했다. [[평안북도]] 출신.
 
== 생애 ==
=== 해방 이전 ===
[[평안북도]] [[구성시|구성군]] 출신이다. [[1929년]] 구성군의 광산을 광업권으로 설정하면서 삼성금광(三成金鑛)을 창설한 뒤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인 최대의 광업자이며 천만장자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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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 해방 이후 ===
광복 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했을때 서대문에 있는 그의 집에 머물기도 하였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친일파 명단]]에 포함되는 등 최창학의 부일 협력 행위에 대한 인식은 있었으나,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1945년]] 12월 조선광업중앙관위원회에 인계이사로 참여하여 일본인 소유였던 광산의 관리와 인계에 관여했고, [[1949년]] 10월 제2차 전국광업자대회 준비위원으로 선정되는 등 광공업계에서 계속 활동한 기록이 남아 있다.
광복 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했을때 서대문에 있는 그의 집에 머물기도 하였다. 또한, [[김구]]에게 자신의 사유지내 별장인 서대문구 [[경교장|죽첨장]]([[경교장]])을 [[김구]]의 사저로 제공하기도 했다. 그뒤 [[한독당]]의 재정적 후견인 중의 한사람이 되었다. 이후 [[경교장]]은 김구의 사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부 청사로도 활용되었다.
 
광복 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했을때 서대문에 있는 그의 집에 머물기도 하였다. 또한,그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친일파 명단]]에 포함되는 등 최창학의 부일 협력 행위에 대한 인식은 있었으나,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1945년]] 12월 조선광업중앙관위원회에 인계이사로 참여하여 일본인 소유였던 광산의 관리와 인계에 관여했고, [[1949년]] 10월 제2차 전국광업자대회 준비위원으로 선정되는 등 광공업계에서 계속 활동한 기록이 남아 있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암살되자 몇개월의 유예기간을 거친 뒤 [[경교장]]을 반납받았다. 그러나 [[한국 전쟁]]으로 실종되면서 경교장은 그의 유족들에 의해 처분, 여러 손을 거쳐 [[강남삼성병원]]의 소유가 되었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 중 피난가지 못하고 [[서울특별시|서울]]에 남아있다가 납북되었다.
 
== 사후 ==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경제 부문과 친일단체 부문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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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김구]]
[[분류:군정기]]
[[분류:대한민국 임시 정부]]
[[분류:한국 전쟁 관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