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퐁 논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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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meau defended his works in a series of essays, and continued to write music in his own style. The musical debate essentially ended when Rameau died in [[1764]].
 
==대구 음악 사랑 카페에서 퍼온 내용.==
 
[[http://www.hosanna71.com/H.Story/12/12.htm]] 프랑스 바로크 중, "라모의 부퐁 논쟁"
 
J.륄리, J.라모 등의 전통적 프랑스 오페라를 지지하는 측과,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를 찬양하는 측으로 갈라져, 음악관 ·미학사상에 이르는 넓은 영역에 걸쳐 서로 그 우열을 다투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프랑스음악과 이탈리아음악의 일반적인 특징에 대한 논쟁으로까지 확대되었다. 곧 아르투지와 몬테베르디, 글루크와 피치니, 한슬리크와 암브로스 등의 논쟁이었는데, 이는 음악사상 매우 유명한 논쟁이었으나, 필전·설전에 그치지 않았으므로 ‘부퐁전쟁’이라고 표현되기도 하였다.
 
발단은 1752년 이탈리아인에 의해 파리에서 상연된 G.페를골레시의 오페라부파 《마님이 된 하녀》(1733)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서 프랑스의 전통적인 궁정오페라 및 프랑스음악의 우월성을 믿는 일파와, 이탈리아의 오페라부파, 더 나아가 이탈리아음악을 신봉하는 일파가 대립하여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는데, 프랑스측의 신봉자에는 국왕 루이15세를 중심으로 하는 귀족과 음악가, 이탈리아측에는 왕비를 비롯하여 J.루소, D.디트로, J.달랑베스 등의 계몽사상가와 그 밖의 지식계급이 있었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출처==
 
[http://www.kcaf.or.kr/basic/music/ch04/ch04-a-03-xx.html]
 
장-필립 라모(Jean-Philippe Rameau, 1683-1764)는 프랑스 고전주의의 대표자입니다. 라모는 오랫동안 귀족 라 푸플리니에르의 후원을 받았는데 푸플리니에르는 오케스트라도 갖고 있었고 자기 집을 예술 클럽처럼 만들어서 당시의 문화예술인들을 초청하곤 했습니다. 그중엔 유명한 계몽사상가 볼테르도 포함되어 있었지요. 이들은 나중에 라모에게 오페라 대본을 써주기도 했습니다.
 
라모는 나이가 쉰이나 되어서야 첫 번째 오페라를 작곡했습니다. 라모의 작품들은 륄리를 계승하던 정통파 음악가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륄리파와 라모파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지요. 이제 라모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음악가란 자연을 묘사하기에 앞서 자연을 배워야 한다. 자신의 정신과 취미를 활용하여 적절한 표현을 위한 음색과 뉘앙스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라모의 창작방식이었습니다. 라모는 오케스트라를 공연에 참여시키려고 한 최초의 음악가이기도 했습니다.
 
라모의 레시타티브는 륄리에 비해 혁신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라모의 작품은 표현상의 배려, 거침없는 선율의 흐름을 지향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레시타티브는 어느 사이엔가 아리아가 되고 아리아는 또 레시타티브가 되곤 했습니다. 화성의 측면에서는 륄리보다 라모가 훨씬 풍요로웠지요. 라모는 또한 클라리넷을 처음 사용한 음악가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라모의 <우아한 인도의 나라들>의 표현은 이전까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희극 <플라테(Platee)>에는 힘있는 익살과 넘치는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지요. 라모의 오페라는 굉장히 생기 넘치는 것으로서, 이는 다양한 요소들이 교체하면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라모의 작품들은 18세기 중엽을 주름잡았습니다만 만년에는 계몽사상가인 장-자크 루소와 '부퐁 논쟁'에 휘말리기도 했습니다. 이 논쟁은 1752년 파리에 있던 몇 명의 이탈리아인들이 상연한 오페라 부파 <마님이 된 하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로 인해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를 찬양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들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범속한 스타일과 발랄함, 민속 음악적 단순함에 매료되었고 프랑스 오페라를 철저히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루소를 필두로 한 계몽주의 백과사전파로서 새것을 애타게 찾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루소는 라모의 <우아한 인도의 나라들>에 대해 합주가 너무 복잡하다, 화성이 너무 으리으리하다면서 '마치 끊어지지 않는 소음과 같다'고 비난했습니다. 루소 편에는 디드로 등의 계몽사상가와 왕비가 섰고 라모 편에는 국왕과 대부분의 청중이 손을 들어주었지요. 이 논쟁은 극장에서의 말싸움과 비방하는 글이 돌아다니는 것에 그치지 않고 결투가 벌어지는 등 가히 전쟁을 방불케 했다고 전해집니다.
 
부퐁 논쟁은 오페라 코믹의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오페라 코믹은 상당히 서민적인 소재를 사용했고 일상생활이나 전원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었습니다. 또한 굉장히 희극적이었으며 풍자적이기도 했지요. 오페라 코믹은 점차 진지해져서 나중에는 낭만주의적 내용도 다루게 됩니다.
 
오페라 코믹은 처음에 파리 세느강 근처의 생 로랑과 생 제르망 장터에서 공연되었습니다. 이때는 오페라나 연극이라기보다는 서커스에 가까웠죠. 그러나 엄청난 인기를 누리면서 곧 연극과 음악이 혼합되어 있고 괜히 무게잡지도 않으면서 너무나 재밌고 통쾌한 형식으로 자리잡아갔습니다.
 
오페라 코믹의 음악은 보드빌로서, 원래 잘 알려진 선율에다가 가사만 바꿔서 부르는 형태였습니다. 결국 18세기 중반에 이탈리아적 희극과 장터에서의 희극이 결합하여 오페라 코믹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지요. 대표적인 오페라 코믹 극장은 '이탈리안 극장'으로 사람들이 이탈리안 극장에 간다고 하면 곧 오페라 코믹을 보러 간다는 뜻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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