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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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장계는 현의 옥연이었는데, 태수가 사사로이 사형을 내리는 것을 거부하다가 태수에게 사로잡혀 관청으로 이송되었다. 장패는 식객 수십 명과 함께 아버지를 구출하여 함께 동해국으로 망명했다. 황건적의 난 때 서주자사 [[도겸]]을 따라 난을 진압하고 기도위에 임명되었다. 이후 서주에서 소규모 군벌이 되어, 다른 소규모 군벌 [[손관]], 오돈, 윤례 등과 연합하여 그 총수가 되고 개양에 주둔했다.
 
[[조조]]의 부장 서흡과 모휘가 [[진궁]] · [[장막 (삼국지후한)|장막]]의 반란에 가담하였다가, 난이 실패로 끝나자 장패에게 망명했다. 낭야상 소건이 서주의 [[여포]]에게 굴복했는데, 장패는 소건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군수 물자를 빼앗았다. 여포는 이를 듣고 [[고순]]의 간언을 물리치고 장패를 공격했으나, 장패가 지키는 성을 빼앗지 못하고 물러났다. 나중에 장패는 여포와 화해했고, 조조가 여포를 정벌하자, 여포와 협력하여 조조와 여러 차례 싸웠다.
 
여포가 서주의 하비성에서 조조에게 패해 죽은 후에 장패 일당은 조조에게 항복했다. 조조는 장패 일당을 용서하고 모두 태수나 국상에 임명했다. 장패는 낭야상에 임명되었으며, 또 청주와 서주 일대를 위임받았다. 조조는 유비를 통해 장패에게 서흡과 모휘를 내놓으라 했으나, 장패는 자신에게 의탁한 자를 해칠 수 없다며 유비를 통해 조조에게 서흡과 모휘를 용서하기를 구했다. 조조는 장패의 말을 기뻐하여 둘을 태수로 삼았다. [[건안]] 4년([[199년]]) 8월, 조조가 장패 등에게 명령을 내려 청주를 침공하게 했다. 관도 대전 중에는 서주와 청주 군대를 이끌고 자주 원소령 청주에 침입하여, 조조가 연주 전선에 집중할 수 있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