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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년]], [[조비]](曹丕)가 왕위를 계승하자 상국(相國)에 임명되었으며, 조비가 황제에 오르게 되었을때는 사도(司徒)에 서임되었다.
이때 화흠은 위의 제신 중에서도 제일 우대를 받았으나, 청빈한 삶에 만족한 화흠은 봉록이나 은상은 구족에게 나누어줬기 때문에 집에 저축도 없었다. 어느 날, 공경(公卿)가 하명하명되었을 되었을때가때가 있었으나, 화흠은 자신의 집에 있던 하녀들을 신분으로부터 해방시켜 다른 가문으로 시집 보냈다. 이때 문제(조비)는 화흠을 칭찬하였다.
또 어느 날 삼공(三公)의 역소에 인사에서는 덕행을 존중해야 하므로, 경전 시험의 비중을 가볍게 해서는 안되느냐는 의견이 나왔을 때 이것에 대해 반론하였고, 학문의 존립이야말로 왕도가 성하는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