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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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김일손·권오복, 권경유, 이목, 허반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선왕을 비방하였다는 죄를 씌워 죽이고, 강겸, 표연말, 홍한, [[정여창]], 강경서, 이수공, 정희량, 정승조 등은 난을 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귀양을 보냈다.
이종준, 최부, 이원, 이주, [[김굉필]], 박한주, 임희재, 강백진, 이계맹, [[강혼]] 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 삽입을 방조했다는 죄로 역시 귀양을 보냈다.
한편 어세겸, 이극돈, 유순, 윤효손, 김전 등은 수사관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파면되었다.
===진실===
훗날 중종때 사화의 단서를 제공한 사초를 누설한 이가 누구냐를 놓고 유자광을 문초했을때 유자광의 처음 진술은 허침에게서 들었노라고 하였다가 심문관이 그럴리가없다 [[이극돈]]에게서 들은것이 아니냐 라고 하자 진술을 바꿔 [[이극돈]]에게서 들었노라고 하여 [[이극돈]]이 사초의 내용을 발설한 최초의 원인제공자로 역사에서는 가르쳐왔으나, [[이극돈]]이 사화 당시에 사초의 내용을 알고도 보고치 않았다는 죄목으로 삭탈관직을 당하고 4개월의 유배를 갔었던 점과 [[조선 중종|중종]]임금이 [[이극돈]]의 3남 [[이세정]]의 상소로 삭탈되었던 직첩을 돌려주는 과정등을 종합해보면 [[이극돈]]은 훈구파의 거두로서 유자광의 번복된 진술에 의한 사림들에 의해 누명을 쓴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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