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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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선은 애초에 일본이 [[중국 국민당|국민당]]과의 [[중일 전쟁]]이 진행 중에 있었고 전쟁 기간 중에 [[비시 프랑스]]령의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하는 등 교전이 있었다. 중국에서의 일본의 세력 확대를 경계하고 [[중화민국]]과 [[장개석]] 정권을 지지해 왔던 미국은 일본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하자 이른바 [[ABCD 포위망]]을 구축하고 나아가 일본에 대한 [[석유 금수 조치]]와 [[미국의 일본 철강 수출 제한|철광의 수출 제한]]을 발동하면서 일본을 고립시켰다. 그러자 자원의 해외 의존도가 높은 일본은 경제 위기의 초래를 우려하였고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영국령 [[말레이 반도]], 버마,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지역의 자원 산지들과 나아가 인도, 태평양의 섬들을 장악해 이 지역의 [[헤게모니]]를 일본을 중심으로 돌리려는 이른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제창하였다.
 
강경파가 득세하는 가운데 미국의 경제 제재가 심화되자 결국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항공모함을 동원하여 미국 [[태평양함대]]의 본거지인 [[하와이 주]]의 [[진주만 공격|진주만을 기습 폭격]]하면서 영국,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다.[[태평양함대]]에 심각한 손실을 입힌 일본군은 공백기간을 이용하여 빠르게 기습을 가하여[[필리핀]]에 상륙하여 [[더글러스 맥아더|맥아더]]휘하의 미군을 압박하고 맥아더는 호주로 탈출하며 필리핀을 빼앗긴다. 이어 일본군은 [[홍콩]], [[싱가포르]] [[미얀마]]([[버마]])의 식민지 주둔 영국군을 공격하였다. 이에 영국은 최신형 전함[[프린스오브웨일즈]]와 순양전함[[리펄즈]], 구축함들로 구성된 [[Z함대]]를 파견하였으나 일본군에 의해 궤멸 당하고 홍콩, 싱가포르, 미얀마(버마) 등을 일본에 빼앗긴다. 일본군은 이어 서부 [[뉴기니 섬]], [[네덜란드령 동인도]] 등 동남아 대부분과 [[솔로몬 제도]]까지의 모든 태평양의 섬들을 점령하였다. 이렇게 초기 전쟁에서 주도권을 쥐게 된 일본은 [[오스트레일리아]]령 남 뉴기니의 주요 항구인 [[포트모르즈비]]를 점령해 오스트레일리아 본토를 노리려 하였으나 육전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의 영웅적 활약으로 패전하였고 해전에서도 미국 항공모함 기동대와 벌인 [[산호해 해전]]이 무승부로 끝나면서 실패하였다.
 
이후 일본은 미국 [[항공모함]] 부대에 의해 [[둘리틀 공습]](1942년 4월 18일)으로 주요 도시가 최초로 미국 공군의 공습을 받았고, 이런 일련의 사태로 일본은 미국 항공모함 부대의 격멸과 태평양에서의 재해권 완전 장악을 위해 [[미드웨이 섬]]에 대한 공세에 나섰지만 [[미드웨이 해전]]에서 대패하면서 항공모함과 함재기, 숙련된 조종사 등을 대거 잃는다.
 
그리고 미국의 거대한 산업이 전시체제로 가동되자 무수히 많은 탱크, 전투기, 군함, 전쟁물자를 쏟아 냈고, 곧 일본군은 질적, 숫적 열세에 놓이게 된다.
 
일본은 [[과달카날전투]], [[마리아나해전]] 등등 남태평양의 섬들에서 벌어진 육전 및 해전에서 참패하였고 전략적으로 크게 중요한 필리핀마저 상실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벌어진 [[레이테 해전]]에서 보유 해군의 대다수를 상실하였다. 또 중국으로 들어가는 영·미연합군의 물자지원 루트를 끊기 위하여 미얀마 서부를 거쳐 인도로 진격하는 [[임팔작전]]을 개시하였으나 밀림에서 보급부족과 항공전력의 열세로 참패하였다. 결국 일본은 한반도의 [[제주도]]와 일본 열도의 [[규슈]], [[오키나와 섬]]을 최후의 방어전장으로 설정하고 항전하려 하였다. 미군은 괌, 사이판에 기지를 두고 [[B-29폭격기]]를 이용하여 일본에 지속적으로 융단폭격을 가했고 필리핀에 있는 공군기지에서 발진하는 항공기와 잠수함 등으로 동남아에서 일본 본토로 가는 자원보급을 완전히 끊어 버렸다. [[1945년]] [[3월 10일]]에는 [[도쿄 대공습]]으로 15만이 넘는 일본인 및 재일 조선인이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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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6월 23일]] 수개월간 참혹한 전투 끝에 일본이 끝까지 사수하려 했던 오키나와가 미군에 함락되었으며,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시|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 시|나가사키]]에 [[원자 폭탄]] 공격을 받고 [[1945년]] [[8월 8일]] 그동안 [[일소불가침조약]]에 따라 중립을 지키던 소련이 조약을 깨고 진격하여 만주와 38도 이북의 한반도를 점령하자 1945년 8월 15일에 항복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장제스]]의 [[중화민국]]과 함께 대일전쟁에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병력이 많지 않아 장제스는 처음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무시 했으나 [[김구 선생]]의 지시를 받은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를 점령하고 [[훙커우공원]]에서 승전기념식을 거행하던 일본군 고위 장성들을장군들을 대거 살상한 의거 이후 큰 감명을 받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 도와 주었다. 특히 김구 선생의 부탁을 받고 영·미 연합군을 설득하여 한국은 [[얄타회담]]에서 전후 독립을 보장 받게 된 유일한 국가가 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은 숫자는 많지 않았으나 버마, 중국 내륙 등에서 포로심문, 게릴라공격, 첩보활동 등에서 맹 활약 하였다.
 
=== 기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