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후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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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적==
본래 [[유우 (후한)|유우]]의 막료로 있었으며, 유우의 명을 받아 장안의 [[헌제]]에게 사자로 파견되었으나, 유주에 도착하기 전에 유우가 [[공손찬]]에게 살해당하자 유우의 묘를 찾아 눈물을 흘리며 곡을 했으며 제사를 지내고 떠났다. 이에 공손찬은 크게 노하여 포상금을 걸고 전주를 사로잡았으나 오히려 전주는 포악한 공손찬 앞에서 한치도 흔들리지 않고 의연했으며 오히려 은근히 그를 비판하였다. 공손찬은 전주가 용기있는 사람이라 생각해 죽이지는 않았으나 군영 안에 감금해 놓고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여론이 나빠질 것을 우려해 곧 전주를 풀어주었다.
 
전주는 유우의 원수를 갚지 못함을 탄식하며 일족 수백명을 이끌고 산 속에 은거했는데, 현명하며 공정한 전주를 따라 백성들이 점차 귀의했으므로 몇 년 사이에 5천여 가구의 무리가 모이게 되었고, 전주는 여러 장로들에게 만장일치로 우두머리에 선출되었다. 전주는 여러가지 법령을 정하고, 예의를 제정하며 학술을 강연하는 등 그들을 다스렸는데 여러 조치가 알맞게 행해졌으므로 일체의 불만이 없었으며 계속 번성했다고 한다. [[원소 (후한)|원소]]는 그를 흠모하여 다섯 차례나 초빙했고, 원소가 죽자 그 후계자인 [[원상 (후한)|원상]]도 예의를 갖춰 거듭 초빙했으나 받았으나 전주는 모두 응하지 않았다. 이는 원소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오환]]이 예전에 전주의 고향인 우북평에서 다수의 고관들을 죽인 것을 항상 증오하며 오환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