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림칠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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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evensaintsinthebamboowood.jpg|350px|thumb|죽림칠현도]]
'''죽림칠현'''(竹林七賢)은 중국 [[위 (삼국 시대)|위]](魏) , [[진 (위진남북조)|진]](晉) 왕조 시절 [[완적]](阮籍) , [[혜강]](嵆康) , [[산도]](山濤) , [[상수 (서진)|상수]](向秀) , [[
“언제나 죽림 아래 모여 거칠 것 없이 술을 마셔, 죽림 7현이라고 불렀다”라고, [[남북조 시대|6조]] [[송 (남조)|송]]의 유의경(劉義慶)이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7인을 한 그룹으로 묶어서 생각하는 것은 일찍부터 있었다. 그러나 그 사상적 중심은 혜강과 완적의 두 사람이며, 다시 산도와 상수,
혜강은 반사마(反司馬)의 거병(擧兵)을 하려 했고, 완적은 혜강이 사마소 때문에 형사(刑死)한 다음해에 죽고, 그 다음해에야 사마씨의 진왕조가 정식으로 성립된다. 산도는 이 정권교체기에 79세의 장수를 누리다가, 진나라 원훈(元勳)으로서 죽었다. 《장자》의 주서(註書)를 쓰고 은일의 뜻을 보인 상수도 [[사마소]]에 사관(仕官)을 구했다. 완적에게서 속물이란 평을 받은 왕융은 진나라 시대까지 장수했으며, 인색하여 밤낮 돈계산을 했다고 전해진다. 〈주덕송(酒德頌)〉을 쓰고, 언제나 술을 휴대하고, 종자(從者)에게 괭이를 가지고 따르게 하여, “내 죽은 곳에 나를 묻어라” 하고 기이한 말을 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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