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1세 표도로비치: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6번째 줄:
|다음 황제=[[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알렉세이]]
}}
'''미하일 1세'''(미하일 페도로비치 로마노프, Михаи́л Фёдорович Рома́нов, [[1596년]] [[7월 12일]] ~ [[1645년]] [[7월 13일]], 재위:1613 ~ 1645)는 제정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개창자이다개창자이며, 그 초대 [[차르]](1614~1645)이다..
 
[[동란시대]](1598~1610)을 거친 뒤에 [[1613년]] [[2월]] 러시아의 젬스키 소보르(전국회의)에서는 새로운 차르를 선출하게 되었는데, 그때 선출된 사람이 미하일 로마노프(1596~1645)로 그가 바로 미하일 1세이다. 그는 [[러시아의 이반 4세|이반 뇌제]](雷帝:재위 1533~1598)의 첫째 황후인 아나스타샤의 오빠인 니기타 로마노비치의로마노프의 손자로, 1613~1633의할아버지를 기간통하여 동안[[류리크 부친인왕조]]의 필라레트마지막 로마노프와차르 [[표도르 1세]]와 공동통치를친척 했었다관계이다.
 
밀사들이 [[모스크바]]에서 미하일과 [[보리스 고두노프]] 통치 때에 수녀가 되는 강요를 당한 어머니가 함께 살던 코스트로마(Kostroma) 근처의 [[수도원]]으로 와서 [[3월]]에 미하일은 [[3월]]에 마지못하여 왕좌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20년 동안 부친인 필라레트 로마노프와 공동통치를 했는 데, 16세의 나이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던 그는 [[7월 11일]]에 대관식을 올렸다.
그는 최고 지도자가 되기엔 마음이 심약한 사람이었다고 하며, 실권은 늘 부모와 측근 고문들에게 있었다. 재위 기간 동안엔 폴란드의 지그문트 3세(재위:1587~1632)의 공격에 시달렸었다. 1617년에 [[스웨덴]]과, 이듬해에는 [[폴란드]]와 각각 친선을 맺어 불안을 없앴으며, [[농노제]]를 강화하였다. <ref>{{글로벌2}}</ref>
 
그는 최고 지도자가 되기엔 마음이 심약한 사람이었다고 하며, 실권은 늘 부모와 측근 고문들에게 있었다. 재위 기간 동안엔 폴란드의[[폴란드]]의 [[지그문트 3세]](재위:1587~1632)의 공격에 시달렸었다. 1617년에[[1617년]]에 [[스웨덴]]과, 이듬해에는 [[폴란드]]와 각각 친선을스톨보보 맺어조약과 불안을디빌리노 없앴으며,화평을 [[농노제]]를맺어 강화하였다불안을 없앴다. <ref>{{글로벌2}}</ref>
 
[[1619년]] [[정교회]]의 수도사인 부친이 폴란드로 잡혀갔다가 풀려나왔다. 그가 러시아에 돌아오면서 [[교회]]의 주교와 미하일과의 공동통치자가 되었다. 그때부터 [[1633년]] 죽을 때까지 [[서유럽]]과 외교, 상업, 문화적 접촉을 늘이던 미하일의 정부를 지배하였고, 러시아의 재정적 궁지 해결, 중앙 정권의 권력을 늘이는 데 지방 정부 조직들의 개혁, [[농노제]]의 강화로서 전국회의의 광범한 활용을 실시하였다.
 
부친이 사망하자 미하일의 외가 친척들이 그의 정부에서 탁월한 역할을 맡았다. [[1645년]] [[7월 13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하였으며, 그의 아들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알렉세이]]가 그의 뒤를 이었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