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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1543년]] [[조선 중종]] 38년 전남 영암(현 해남 옥천면 대산리<ref>해남신문 http://www.h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088</ref>)에서 훈련참군 정응정(應禎)의 아들로 태어났다.
[[1570년]] 선조 3년에 28세로 식년시에 병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봉사, 금갑도수군권관(金甲島水軍權管) 등을 거치고 함경도 거산찰방(居山察訪)을 거쳐 [[1583년]] 함경감사 정언신의 추천을 받아 승진하여 웅천현감 등을 지냈으나 성격이 강직하고 정의를 지켰기 때문에 미움을 받아 몇 해 동안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ref>{{웹 인용
|url = http://people.aks.ac.kr/view.jsp?id=PPL_6JOb_A1543_1_0012213|제목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확인일자 = 2009-2-14|저자 = |작성일자 = |출판사 = 한국학연구회|원본일자 = |인용 =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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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1년]] 녹도만호(鹿島萬戶)가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상우수사 [[원균]]이 구원을 요청하자 전라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 휘하에서 군관 [[송희립(宋希立)]]과 함께 결사적으로 출전할 것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적을{{인용문2|적을 토벌하는 데, 우리 도와 남의 도가 없다. 적의 예봉을 꺾어 놓아야 전라도로 보전할 수 있다.}}
 
그 후 거제 앞바다에서 원균을 만나 옥포(玉浦)에서 왜선 30척을 격파하고, 노량진에서 적선 13척을 불살라 공을 세웠다.<ref>{{웹 인용|url = 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nb_12505001_020&grp=&aid=&sid=252403&pos=0|제목 = 조선왕조실록, 선조 25년, |확인일자 = 2009-2-14|저자 = |작성일자 = 1592-5-1|출판사 = 조선왕조실록|원본일자 = |인용 = 26권}}</ref>
[[당포]](唐浦)·한산 등의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마침내 [[1592년]] 9월 부산포 해전에서 우부장(右部將)으로 선봉에서 싸우다가 절영도에서 적의 대포를 맞아 전사하였다. 이때 안타깝게도 이 적의 대포는 바로 붙잡힌 조선 포로가 쏜 대포라고 한다. 정운의 사망으로 이순신은 오른팔을 잃은셈이 되어 목을 놓아 울었다고 한다.<ref>{{웹 인용|url = 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na_13001023_001&grp=&aid=&sid=252402&pos=4|제목 = 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 |확인일자 = 2009-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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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저자 = |작성일자 = 1597-1-23|출판사 = 조선왕조실록,|원본일자 선조= |인용 = 25년,84권}}</ref>
|확인일자 = 2009-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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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포(唐浦)·한산 등의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마침내 [[1592년]] 9월 부산포 해전에서 우부장(右部將)으로 선봉에서 싸우다가 절영도에서 적의 대포를 맞아 전사하였다. 이때 안타깝게도 이 적의 대포는 바로 붙잡힌 조선 포로가 쏜 대포라고 한다. 정운의 사망으로 이순신은 오른팔을 잃은셈이 되어 목을 놓아 울었다고 한다.<ref>{{웹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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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
|확인일자 = 2009-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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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어떤 의도이건 간에 정운은 전승무패의 부담을 안고 있는 [[이순신]]에게 적극적인 전투를 주문한 것으로 보인다. 1594년 정곤수가 선조에게 "정운이 '장수가 만일 출전하지 않는다면 필시 전라도는 수습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겁박하여 출전하게 하였다."라는 대목(상기와 동일한 대목)<ref>{{웹 인용|url = 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na_12711012_001&grp=&aid=&sid=252402&pos=3|제목 = 조선왕조실록, 선조 27년, |확인일자 = 2009-2-14
|저자 = |작성일자 = 1597-11-12|출판사 = 조선왕조실록|원본일자 = |인용 = 57권}}</ref> 이나 1597년 선조 30년 김응남이 선조에게 "정운이 이순신이 나가 싸우려 하지 않는다 하여 참하려 했다"는 당쟁의 비방이 엿보이는 과장적인 기록에서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url = 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na_12711012_001&grp=&aid=&sid=252402&pos=3
|제목 = 조선왕조실록, 선조 27년,
|확인일자 = 2009-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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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 장군이 부산포에서 순절하자 고향 해남에서는 최산수, 최정한, 양예용이 함께 유림대표로 제문(祭文)을 지어 치제하였다. 선조는 1592년 대호군 정운을 북병사로 추층하였고, 1604년에 병조참판에, 1796년(정조 20)에 병조판서 겸 의금부훈련원사로 추증되었다. 1605년 선무원종 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ref>{{웹 인용
|url = 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na_13001023_001&grp=&aid=&sid=252402&pos=4
|제목 = 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 |확인일자 = 2009-2-14|저자 = |작성일자 = 1597-1-23|출판사 = 조선왕조실록|원본일자 = |인용 = 84권}}</ref>
|확인일자 = 2009-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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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 8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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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현 해남 옥천면 대산리)의 충절사(忠節祠), 흥양의 쌍충사(雙忠祠)에 제향되었다. 숙종때 충절사라 사액하였으며, 정조 때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