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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5년]]<ref>원풍(元豊) 8년</ref> 신종이 붕어하고 [[북송 철종]](哲宗)이 10살의 나이로 즉위하고, 섭정 선인태후(宣仁太后) 고씨(高氏)의 명령으로 [[재상]]으로 중앙에 복귀했다. 이때 사마광은 신법을 전면적으로 폐지하고, 모두 신법실시이전의 법으로 되돌려 정권을 운영했으나, 매우 극단적이기에 같은 신법의 폐지를 주장하던 친구, 부하들에게도 반대받을 정도였다. 더해서 사마광의 명성은 천하에 울려퍼질 정도로 영향력이 있어 많은 관료가 사마광의 발언에 영합해 거꾸로 신법 여러 정책 중에 근간 중 하나였던 역법(役法)을 변경할 정도였기에 그 폐해는 이후 10년 가까이 영향을 끼쳤다. 바라던 신법 폐지에 전력을 기울이던 사마광이었지만 재임 8개월 만에 병으로 죽었다.
 
== 평가평가와 비판 ==
=== 평가 ===
오래전부터 사마광의 평판은 매우 높았다. 그것은 그가 속한 구법파의 흐름을 따르던 주자학이 학계에 군림하였고 사마광을 격찬한 것도 원인이 되었다. 그 입장에서 본다면 사마광은 군자 중에 군자로, 또 시시비비가 없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근대이후 발전한 경제사학적인 입장으로 본다면 사마광은 오랜 대지주, 대상인을 옹호하고 이들의 정권세습 타파를 노리던 신법을 배제하는 반동적 정치가 중 한 명으로 주목받았다. 사마광은 왕안석의 신법의 의의를 모두 이해하지 않았고 단지 수구파의 영수 이외의 어떤 것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아니면 사마광이 재임한 지 겨우 8개월 만에 서거했기 때문에 왕안석의 신법을 대신할 방책을 고려했지만 이것을 바꿀 때까지의 시간을 얻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 비판 ===
그러나 [[왕안석]]과 상대 당을 이해하지 않으려 했다는 비판도 공존한다. 그에 의하면 사마광은 왕안석의 신법의 의의를 모두 이해하지 않았고 단지 수구파의 영수 이외의 어떤 것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아니면 사마광이 재임한 지 겨우 8개월 만에 서거했기 때문에 왕안석의 신법을 대신할 방책을 고려했지만 이것을 바꿀 때까지의 시간을 얻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 자치통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