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릭스 멘델스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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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델스존은 [[교향곡]], [[협주곡]], [[오라토리오]], [[피아노|피아노곡]], [[실내악|실내악곡]]을 썼다. 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음악에 대한 관심을 되살리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음악 취향이 변화하고 [[반유대주의]]가 대두되면서 오랜 세월동안 그는 무시받다가 오늘날 그의 독창성이 재평가되고 있다. 멘델스존은 이제 [[낭만주의 음악]] 음악가 가운데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1843년]] 라이프치히 음악원을 창립하고, 이어 프로이센 국립 음악장, 라이프치히 대학 명예 박사가 되었다.
 
[[1847년]] 봄, 몹시 따르고 좋아했던 누이가 숨지자, 그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 몸져 누웠다. 시름시름 앓던 그는 그해 가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사후 ===
원래 유태인 혈통이었으나 아버지 아브라함이 신교로 개종하면서 맨델스존이라는 이름에 바르돌티 (bartholdy)를 붙여 다른 맨델스존가와는 구별되게 하였다. 그러나 혈통이 유태인이었던 탓에 [[독일]]에서 [[나치]]시대에 [[라이프치히]]에 있던 그의 동상이 철거되고 그가 작곡한 <결혼 행진곡>연주 까지 금지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ref>{{뉴스 인용
|언어고리 =ko |이름 = |성 = |저자 =신동헌 |공저자 = |제목 =재미있는 음악사 이야기 |url = |형식 =
|작품명 = |출판사 =서울미디어 |쪽 =236 |작성일자 =
|확인일자 = |언어 = |인용 =}}</ref>
== 작품 ==
그의 일생은 실로 작곡과 연주의 연속이었다. 그는 [[슈베르트]]와 같은 생활의 고통이 없이 비상한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는데, 그것이 작품상에 나타나, 명쾌하고도 아름다운 음악이 되었다. 그는 색채적이며 우아한 낭만적인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베토벤]]·[[브람스]]의 곡과 함께 3대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손꼽힌다. 그의 유명한 작품은 [[바흐]]의 고전 음악 연구에서 배워 얻은 바가 많고, 바흐를 세상에 소개한 공적은 실로 크다. 그는 [[낭만파]]의 선구자로, 신고전파의 길을 지시한 것으로서, 음악 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ref>{{글로벌2}}</ref>